1983년 11월, 정탐 여행에서 지하성도들을 만나고 미국의 추수감사절 즈음에 집으로 돌아간 저는 편안함을 잃었습니다.
제 가슴과 제 영혼에는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이국에서 살아간 조선족들이 들어와 머물렀습니다.
그들의 짓밟힘과 차별과 경제적인 어려움, 부모 혹은 할아버지 때 이전에 떠나온 고향을 잃은 서러움만이 아니었습니다.
북한 땅에 남아서 고생하는 이들에 대한 아픔과 돕지 못한 동포로서의 죄송함, 그리고 신앙 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한 고통이 통증으로 남았습니다.
돈을 들여서 홀로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중국 선교를 하는 이들을 만났습니다.
밤이면 텅 빈 교회에 가서 밤을 새워가며 하나님께 아우성을 쳤습니다.
중국에서 돌아온 지 20개월 만인 1985년 9월에 아버님을 뵙고 사역하던 교회를 사임하려 함을 의논드렸습니다.
“사표를 냈니?”
“써 놨는데요.”
“목사는 사표를 내면 흥정하는 게 아니다.”
마치 이 길을 갈 것을 알고 계셨다는 듯이 말씀하신 아버님이셨습니다.
한 달 후인 10월 28일에 중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돕는 이 없이 철저히 빈 손으로 시작한 것이 모퉁이돌선교회였습니다.”=
배고픔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옷 한 벌 제대로 입히지 못했습니다.
아내에게도 충분한 생활비를 줄 수 없었던 기간이 오래 이어졌습니다.
그런 와중에 북한 영혼을 위한 성경 번역이 이뤄져야 했습니다.
사역하는 모든 선교지마다 사역비가 공급되어야 했습니다.
때때로 아프고 중단하고 싶은 충동이 있었습니다.
심장과 허리의 통증으로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사역을 중단할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40년째의 사역을 이어갈 뿐입니다.
나 한 사람의 눈물이 저 지하 성도들을 자유케 할 날을 기다립니다.
오늘까지 아파한 아픔은 북한 지하성도들의 아픔입니다.
그것을 나누기 원했습니다.
이제라도 그 아픔을 함께할 7천 명을 얻기 위해 엎드립니다.
무익한 종 이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