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수비대를 피해 성도의 집으로
“여기에 잠깐 숨었다가 가십시오. 아까 일러드린 대로 저 길을 따라 쭉 가면 인가가 나올 겁니다. 몸조심하십시오. 그럼….”
일꾼에게 눈인사를 건넨 밀수꾼은 잰걸음으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밀수꾼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서 북한 영내로 넘어온 일꾼은 한 치 앞도 분간되지 않는 어두움과 풀벌레 소리만 고요하게 들리는 적막 속에 홀로 남겨졌다.
시간이 흐르자 어두움에 눈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일꾼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뗐다. 한 발, 한 발, 꽤 오랜 시간을 걸었음에도 밀수꾼이 말한 인가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곧 동이 터올 시간이라 조바심이 났지만 계속 걷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 새벽에 어디에서 오십니까?”
등 뒤에서 웬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뒤를 돌아보니 한 건장한 남자가 일꾼을 노려보고 있었다.
“친척이 이 동네에 살고 있어서 중국에서 놀러 왔습니다.”
일꾼은 긴장해서 돌처럼 굳은 입술을 가까스로 열어 변명했다.
“통행증을 해 가지고 오셨습니까?”
“그럼요. 그런데 친척 집에 두고 왔습니다.”
“그래요? 그럼 같이 가서 보십시다.”
거짓말이 들통나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렇다고 남자가 시키는 대로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처음에는 순순히 동행하는 척하다가 일꾼은 동네 입구로 들어갈 즈음,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서 줄행랑을 쳤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가던 일꾼의 눈에 문이 살짝 열려 있는 집이 보였다. 다급한 대로 곧장 그리로 뛰어들어가 문을 닫고는 한걸음에 방문까지 달려가 몸을 숨겼다.
여덟 가정이 모여 예배합니다
“뉘, 뉘시오.”
방안에 있던 여자와 어린아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꾼을 쳐다보았다.
“정말 미안하오. 사정이 급해서 그렇소. 나를 잠시만 숨겨 주시오.”
일꾼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정하자,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한 일꾼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을 구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했다. 기도가 끝나고 방안을 둘러보던 일꾼의 눈에 범상치 않은 물건이 들어왔다. 여자가 옷 뒤로 숨기고 있어서 전체가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성경이 틀림없었다.
“아주머니, 예수 믿으세요?”
일꾼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여자는 당황해서 얼굴이 굳어졌다.
“아주머니, 저도 예수 믿습니다. 성경책은 어떻게 구하셨어요? 겉이 나달나달한 걸 보니 꽤나 오래 읽으셨나 봅니다. 예배는 혼자 드리십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더 이상 숨길 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여덟 가정이 모여서 예배합니다. 성경책은 저희를 지도하는 분이 주셨는데 저희끼리 돌려서 보고 있습니다.”
일꾼은 하나님의 섭리에 탄복했다. 발각될 위기를 모면하려고 도망쳤을 뿐인데, 하나님은 이 사건을 사용해 자신을 성도의 집으로 인도하신 것이었다. 일꾼은 여자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하 처소가 비단 00시뿐만 아니라 00시, 00도에 흩어져 있고, 한 명의 지도자가 각 지역을 순회하며 목양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이들이 가난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12명의 고아를 입히고 먹이고 돌보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날 밤, 일꾼은 여인의 남편의 옷을 입고, 여인이 알려준 비밀 통로를 따라 중국으로 넘어갔다. 국경을 지나며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만나게 해 주신 귀한 성도들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 어둠이 깊어지면서 일꾼의 고민도 깊어졌다.
새 신자 성경 교재가 필요합니다
그날의 만남 이후 일꾼은 정기적으로 그곳 성도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지원했다. 어떤 때는 종자를, 어떤 때는 성경책을, 어떤 때는 돈과 여러 물품들을 보내어 여덟 가정이 나누어서 쓰게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 신자 교재 000권을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다. 백 권이 넘는 책을 요청한 것으로 보아, 00시 책임자가 관리하는 지하 교회가 엄청난 규모임을 짐작케 했다. 일꾼은 직접 상황을 확인하고자 책임자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한참 후에야 의외의 답이 쪽지로 전해졌다.
“선생님, 그간의 고마움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아시면 됐지 서로가 굳이 만날 것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꾼은 일 년 반 동안이나 물심양면으로 도왔는데 어떻게 한번 만나자는 요청을 단칼에 거절하는지 한편으론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상황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어서, 새 신자용 성경 공부 교재를 최대한 작은 크기로 만들어서 보냈다. 그 책을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또 다시 북한에서 소식이 왔다.
“위험합니다. 당분간 안 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어떤 말이나 편지가 건너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 즈음 국경 경비가 한층 강화돼 사람을 보내서 형편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북한 00시의 여덟 가정과 새 신자 교재 000권은 그렇게 잊히는 듯했다.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선생님, 말씀하신 그분을 찾았습니다. 믿는 것이 발각되어 고초가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 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셨는데, 집에 계십니다.”
그간 00시 책임자를 찾는 일에 번번히 실패해온 일꾼에게는 반가운, 그러나 가슴 아픈 소리였다. 연락이 안 닿는 동안 온갖 고생을 다 했을 지도자를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글썽여졌다.
“찾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집으로 가서 어떻게 지내는지 좀더 자세히 알아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분께 00년에 편지를 보낸 사람이라고 하면 기억할 겁니다.”
일꾼이 당부했다.
“안 그래도 가지 않았겠습니까. 선생님 이야기를 했더니 ‘내가 그 선생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라며 울먹이셨습니다. 사정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집은 허물어지고 몸은 병이 들어 의사가 큰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답니다. 먹는 거 입는 거는 말할 것도 없고요. 같이 사는 식구는 없지만, 만나는 식구가 4명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꾼은 당장 쌀과 돈을 준비해서 지도자에게 보냈다. 광야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돌아보는 사람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지도자에게 일꾼의 선물은 크나큰 힘이 되었다. 가난과 고통, 병마의 희생 위에서 신앙을 지켜가는 북한의 성도들이 지치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도록 기도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