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을 해 보니
지금까지 살아온 길 주님이 인도했네♫”
20여 명의 탈북 성도와 한국 성도들이 김장에 쓸 재료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찰나였다. 주방 한 쪽에선 쪽파를 다듬고, 한 쪽에선 채소를 씻고, 또 다른 한 쪽에선 무를 써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서걱서걱, 또각또각, 탁탁탁탁, 규칙적인 물 소리와 칼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누군가 「발걸음은 언제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외면하지 않으시는 우리 주님 때문에
눈물로 살아온 길 웃음으로 변했네
나의 주여 이 죄인 용서하소서
이제는 그 사랑 전하리라 이 세상 땅끝까지♫”
곱게 무를 채 썰던 한 탈북민이 선창한 「발걸음은 언제나」는 두세 소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사를 아는 사람들이 합류해서 다 같이 부르는 합창이 되었다. 오전부터 시작해서 밤 11시를 넘어서까지 이어진 재료 손질로 지친 기색들이 있었는데,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찬양으로 올려지자 다시금 생기와 활력이 불어넣어지는 듯했다.
“찬양을 하니까 신기하게 힘이 났어요. 처음에는 바구니에 야채가 담겨 나오면 우르르 모여들어서 다듬고, 다음 거를 또 하는 게 너무 재밌었어요. 북한 생각도 나고요. 예전에 농촌 동원 나가서 무랑 양배추를 이렇게 많이 썰었거든요. 그런데 하루 종일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지쳐있었는데 찬송을 하자 했더니 힘이 어디서 났는지 눈이 번쩍 뜨이고 신이 났지 뭐예요.”
맨 처음 「발걸음은 언제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 탈북민 김다연 자매의 말이다.
“맞아요. 다연 언니 찬양을 따라하면서 ‘너무 좋다’ 했어요. 북한에서 일할 때 노래하던 생각도 번뜩 났어요. 힘든 건 모르겠어요. 그냥 찬양하며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했어요.”
탈북민 김남숙 씨도 한 마디 거들었다. 물리적으로는 일을 해야 하기에 수고로움이 따르지만 서로를 돕고 웃고 이야기하며 찬양한 그 시간은 김장 전투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녹아든 천국 잔치의 시간이었다.
내년에는 평양에서 김장합시다
여성들이 주방에서 노동의 피곤함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날려버리는 동안, 남자들은 바깥에서 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김장 전투를 이어갔다. 하필이면 김장 속을 준비하던 날이 기온이 전날보다 10도 이상 떨어져서 영하권을 맴돌았다. 게다가 매서운 바람까지 가세해 모퉁이돌선교센터 앞에 방한용으로 쳐 놓은 비닐 천막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요동했다.
쓕쓕~ 휙휙~ 비닐을 비집고 들어오는 사나운 바람을 맞으며 7명의 남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배추 박스를 뜯어내 물을 빼는 작업을 전담했다. 안에 면 장갑을 끼고 고무장갑까지 착용했지만 배추에 칼집을 내는 손가락은 추위에 얼어 감각이 없어졌고, 배추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반복 작업으로 허리와 허벅지 통증이 가중됐다. 이러다 순교하겠다는 우스개 소리가 흘러나오는데 김갈렙 탈북민 목회자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내년에는 우리 삼천 포기 합시다!”
양념에 들어갈 재료를 챙기느라 때마침 옆에 있던 본회 세리나 간사가 화들짝 놀라 대꾸했다.
“목사님, 지금 천칠백 포기 배추만 해도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삼천 포기를 합니까?”
김갈렙 목사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간사님이 삼천 포기를 한다고 하면 우리 교회 전교인 을 다 데려오겠습니다.”
탈북 성도들이 더 온다는 말에 세리나 간사는 퍼뜩 북한을 떠올렸다. 그리고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목사님, 그럴 거면 강화도가 아니라 평양에서 삼천 포기를 해야지요.”
“좋다마다요. 내년에는 우리 다 같이 평양 가서 김장하는 겁니다.”
북한에서 김장을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김갈렙 목사와 세리나 간사는 피곤함과 추위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런 기대를 품을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감사한 밤이었다.
강 건너 북한 사람들과 함께할 날을 기다려요
다음날 아침 8시, 80여 명의 탈북민과 한국 성도들이 모퉁이돌선교센터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본격적인 김장 전투를 준비했다. 남자들이 주걱으로 양념을 골고루 섞어서 배추와 함께 갖다 주면, 여자들이 속을 넣어 맛있게 버무렸다. 일하기 편하게 일렬로 세운 탁자 앞뒤로 남북의 성도들이 얼굴을 마주보고 서서 김치를 담았다. 그러다 보니 말문이 자연스레 터졌다.
“북한에서도 집집마다 김장을 같이 하나요?”
평소 궁금했던 북한의 김장 문화를 곁에 있는 탈북 성도에게 물었다.
“그럼요. 동네 사람들끼리 돌아가며 품앗이를 하지요. 김장날이 되면 옥수수밥, 조강냉이죽을 해 놓고, 감자를 삶아서 김치 노란 속에 양념을 발라 가지고 먹어요. 형편이 좀 나은 집은 고춧가루며 생선, 돼지고기를 넣기도 하는데, 없는 집은 그냥 시퍼런 배추를 소금에 절여 무만 뚝뚝 썰어 가지고 섞어서 먹죠. 고추가루 없이 하는 집들이 많고 김장을 아예 못하는 집들도 있어요.”
“김치는 얼마나 담그나요?
“북한에서는 김치를 반년 식량이라고 해요. 김장을 안 하면 겨울에 먹을 반찬이 없거든요. 김치가 있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김장 전투라고 불러요. 집집마다 평균수백 포기씩은 담그는데 식구 수대로 한 독씩은 한다고 보시면 돼요. 김치 양이 많아서 김장철이 다가오면 부모님들이 근심하시고, 또 식구들이 힘을 보태서 다 같이 준비하죠.”
“저희는 수십 포기 하는 게 고작인데, 북한에서는 정말 큰 행사네요.”
남북 성도들이 이야기 꽃을 도란도란 피우는 동안, 간이 잘된 양념에 버무려진 배추 2백여 박스가 차곡차곡 쌓였다. 사랑과 정성으로 만든 1700포기 김치가 탈북민들의 식탁에 올라갈 일만 남았다. 남북이 함께한 김장이 마무리되는 시간. 탈북민들은 남다른 감회를 느끼고 있었다.
“남과 북이 주님 안에서 함께 김치를 담근 게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요. 북한에 가서 이렇게 김장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고요. 정말 2024년에는 세리나 간사님 말씀처럼 모든 탈북 성도들이 북한에 올라가서 김치를 담글 것을 기대합니다.”
“믿음 안에 사는 남북의 성도들이 북한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김장을 한다는 게 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났어요. 통일이 되면 강 건너 사는 북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김장하러 오겠죠? 함께 김치를 담글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어요.”
북부중앙교회 김예나 전도사와 나오미찬양단 김남숙 단원이 나눠준 이야기다. 이들의 소망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아름답게 이뤄지기를 고대하고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