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콤특집2] 성경배달과 선교에 열정을 불태운 하나님의 종 지수목사(2018.8)

 

2018년 5월 어느 날, 메신저로 장례식 장면이 담긴 사진 3장이 왔다.
곧 이어 문자가 도착했다.

 

“중국의 지수 목사님이 소천 하셨습니다. 열심히 사역하다가 주께로 간 것이 참 좋아 보입니다. 이렇게 떠난 분들이 너무 부럽습니다.”

 

1995년 9월 초로 기억한다.
내몽골은 이미 서리가 내리는 추운 날씨에 들판에 자라던 풀들이 누렇게 변해 황량했다. 하루를 머물고 떠나려고 기차에 올라탔을 때 시골에서 몇 시간씩 기차를 타고 온 성도들이 배웅을 하려고 나왔다. 그들은 창문을 열고 준비해 온 과일 등을 넣어주며 눈물을 흘렸다. 한국에서 찾아간 우리를 처음 만난 순박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환대하며 배웅해 주었다. 그 당시 지수목사는 이미 우리가 보낸 많은 양의 성경을 받아서 그룹의 성도들과 지도자들에게 공급을 하면서 M, N, B 지역 등에서 시골교회 목회자들을 모아 가르치는 신학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누구의 후원이나 지원도 없이 카펫을 짜서 팔아 그 비용으로 신학교를 운영하며 주께 받은 사명을 감당해 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가 보내주는 성경은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성경을 보내달라는 그의 요청이 계속되었고 보내진 더 많은 성경은 내몽골과 서북지역 성도들과 목회자들에게 보내졌다. 보내달라는 성경의 양이 점차 많아졌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점점 더 사역이 확대되어 갔다.

 

2003년, 보내진 성경을 받아 배달하는 것이 노출되어 중국공안의 추적을 받게 되었고, 지수목사는 감옥에 갇혔다. 이 일로 지수목사는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함께 사역에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거나 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며 여러 번 감옥에 다녀온 터였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는 지수목사는 교회를 세울 수 없었던 상황에서 1,200명 이상 모일 수 있는 큰 집회장소가 필요했다. 정부에서는 허락해주지 않았지만 지수목사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큰 극장 건물을 빌려서 공연하는 것처럼 문화행사로 등록했다. 극장 안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가득 찼다. 갑자기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에 놀라서 경찰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경찰들은 문화행사라고 하니 시작할 때까지 어쩌지 못했다. 지수목사는 시간이 되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 때 복음을 들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했다. 이것을 공안당국에서 문제를 삼았으나 지수목사는 복음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은 가택연금을 당하였다. 그런 중에도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은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열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중국교회가 선교를 생각하지 못하던 2002년, 중국교회의 여러 단체 대표들과 신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 단체는 100명의 선교사를 양육하여 보내겠습니다”라고 외쳤다. 중국에돌아온 그는 외국에 복음 들고 나갈 수 있는 젊은이들을 양육하는 ‘선교훈련원’을 시작했다. 자격은 그가 운영하는 3곳의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 가운데 선교할 수 있는 젊은이들을 선발해 훈련을 시작했다. 신학을 공부한 그들에게 선교훈련과 함께 현장에 나가는데 필요한 영어, 컴퓨터등의 필요한 것을 가르쳤다.

 

그렇게 해서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등에 다수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 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 4km 조깅을 하는 그에게 “왜 그렇게 바쁜 중에도 운동을 쉬지 않느냐?”고 일꾼이 물었을 때 “나도 선교현장을 나가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체력을 단련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지수목사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수 있도록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성경을 배달하는 것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여러 번 감옥에 갇혔던 그는
“핍박은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목적이 끝나면 우리에게서 고난을 거두십니다.”라고 말했다.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던 그의 고난은 하나님 품에 안기며 거두어졌다.

 

그와 함께 동역하며 곁에서 지켜왔던 일꾼은 말한다.
“제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믿음의 친구가 세상을 떠나서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 크지만 너무 부럽습니다. 죽음이 항상 제 곁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 끝까지 충성을 다해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간 그를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생각하니 부럽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하나님 앞에 설 생각을 하면 책망 받을 일이 많은 것 같아 두렵습니다.
지수 목사는 중국에서 제가 교제한 지도자들 중에서도 순수하고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우리를 향해 성경을 계속 보내주어 너무 고맙다고 했던 말이 귓전에 맴도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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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소식1] 의를 위해 갇혔으나 하나님 안에서 나는 자유했다!(2018.08)

 

북경의 한 야외공원에서 펑펑 내리는 하얀 눈을 맞으며 예배를 드리는 장면의 사진이 2009년 12월 카타콤소식에 소개되었다.
정상적으로 비용을 지불하고 마련한 성전의 열쇠를 빼앗은 당국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의연히 둘러선 수많은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를 듣고, 성가대원들의 손에 들려진 악보에 내린 눈이 녹아 물방울로 적셔진 가운데 울려 퍼지던 모습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급기야 2011년 4월 야외에서 설교했던 목사와 몇몇 장로들이 가택연금을 당하였다.

 

가택연금 상태에 있는 그 교회의 진목사를 찾았을 때, 현관 앞 복도에는 두 개의 침대가 ‘ㄱ’자로 놓여 있고 그 곁에 의자 세 개가 놓여 있어, 공간이 비좁고 복잡했다. 그 곳에 사복 차림을 한 경찰이 앉아 있었다. 진목사는 현관 앞에 앉아 있던 경찰과 잠시 무슨 말을 나눈 후 현관문을 조금 열어 놓았다. 집에 손님이 찾아와도 완전히 문을 닫을 수 없으며, 경찰은 집안의 동태를 살피게 되어 있었다.
많이 힘든 모습일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가택연금 되기 전 폐결핵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정말 활기차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탄압하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가택연금이 시작된 지 7년 4개월이 지났습니다. 처음에는 금방이라도 풀려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아주 빨리 지나간 느낌입니다. 지루하거나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느낌도 없고, 한 해 한 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빨리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그는 가택연금이 되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2011년 4월 10일에 가택연금 되었습니다. 집안에 갇혀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바깥 세상과 교류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제 자신이 오그라드는 것 같고 끝없이 깊은 수렁 아래로 빠져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건강까지 악화되어, 어쩌다 아내가 지나가다 살짝 제 몸에 닿기만 해도 부서질 듯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나 스스로 느끼지 못했지만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것 같습니다.”

 

진목사는 그토록 자신을 힘들게 한 것은 “당국에서는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양들이 흩어지지 않으니까 양들을 직접 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자매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면 가족들이 당장 어려움에 처하였고, 또 어떤 자매는 남편이 믿지 않는데 갇혀 고난을 당하고, 또 다른 형제는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어떤 형제는 어느 날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양들을 괴롭히는 일들이 몇 년 동안 계속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 이 어려운 싸움을 시작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 당시 저희 교회는 200명, 150명, 100명 등 열두 처소에서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처소가 많으니 제가 두 달에 한 번도 가기 힘들 정도로 교회가 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두가 함께 할 예배당을 마련하기로 결단했습니다. 또 한편으로 이제 교회를 드러내고 사회에 복음적인 영향을 미칠 시기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예배할 수 있는 빌딩의 한 층을 예배당으로 사용하려고 현금을 주고 구입하고 공식적으로 교회 등록을 신청했습니다. 교회가 커지고 사역이 활성화되면서 우리 교회는 정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성장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며, 누구도 이 교회를 빼앗아갈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해야만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중국 정부는 허락과 탄압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정부는 탄압을 결정해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하나님을 향한 강한 믿음과 결의, 그리고 시대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진목사는 교회가 탄압받는 과정에서 미친 영향을 계속하여 설명했다.
“가택연금이 있기 전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갑자기 완전무장한 공안들 40~50명이 교회 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적어도 10개 부서에서 나온 공안들이 예배당을 둘러싸는데 단 한 사람도 미동하지 않고 계속 예배를 드렸습니다. 중국에서 정부의 탄압을 막을 사람이나 단체가 없을 정도로 국가권력이 막강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공안들이 놀라 밖으로 나갔다가 예배를 마치자 들어와 성도들을 한 사람씩 조사했습니다. 나중에 이들 중 한 사람으로부터 듣게 된 사실인데 ‘의연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보며 겁나고 두렵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매 주일 야외에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인근 100여 개 파출소에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파출소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상담해주고 기도해 주는 것을 본 공안들이 ‘너희 교회는 진정한 교회다’라고 했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도시가 숨겨지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 비추는 빛은 중국 정부도 감추지 못합니다.”

 

진목사는 목회자가 7년 4개월 동안 감금된 상태에서 지금 교회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설명하였다.

 

 

교회 사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가 교회 건물을 봉쇄하고 가택연금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예배와 사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목자를 가두었지만 교회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고 성도들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 중에도 지금 40여 개의 처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매주 수요일에는 기도회, 매달 첫째 화요일에는 성찬식, 1년에 두 번 정도 세례식도 거행합니다. 교회 내 열 개 이상의 사역 부서도 주일 예배를 제외하고는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그의 말에, 어떻게 목사가 7년 4개월 동안 감금되어 있는데 교회 사역이 계속될 수 있느냐고 질문했더니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전 성도들을 훈련시켜 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독립적으로 세워 양육하게 하셨지요. 교회는 목자 한 사람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건강하게 세워져서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로 자생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20년 동안 하나님 안에서 영적 전쟁을 통해 무장되었기에,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목사와 성도들을 향한 정부의 탄압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교회가 건강하게 지속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는 “저는 목회하면서 교회에 목사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대신 리더들을 세워 그들의 영향력이 커지도록 지도자로 세우는 사역을 견지해 왔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성도들을 지도자화 한 것입니다. 제가 없어도 그들 안에서 사역이 가능하도록 양육해 왔습니다. 그러하기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이 머리되시는 교회임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본 중국 교회에 작은 파동이 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핍박을 감내한 성도들은 신앙의 모범으로서 중국 교회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가 핍박을 받는 동안 다른 교회에 대한 핍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수적으로 크게 성장한 교회들이 많아졌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교회적으로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가는 동안 개인적으로도 놀라운 변화가 있었음을 들려주었다.

“가택연금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밖으로 나가려고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1년이 조금 지난 2012년 여름부터 저희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에 한하여 하루 두 시간씩 저를 감시하는 경찰이 동행하는 상태로 외출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밖으로 나온 순간, 집 안과 집 밖의 공기가 그렇게 다른 줄 몰랐습니다. 밖에 나온 것만으로도 무엇인가 억눌렸던 것이 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첫날부터 아파트 주위를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없어 휘청거려 천천히 걸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지나면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3km를 달리고 점점 거리를 늘려 많이 뛰는 날은 12km를 뛰었습니다. 달리는 동안 속에 쌓여 있던 울분이 터져 나오면서 기도로 변하였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우 속에서도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리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 등 뒤에 계신 하나님께서 든든하게 받쳐주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없이 밑으로 떨어지고 안으로 우그러들고, 끝없이 추락하다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그 상태에서 ‘사람이 왜 사는가’와 같은 인간적인 질문을 거듭하며 가장 깊은 골짜기를 지나, 저를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힘겨운 시간 속에서 자신을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신실함을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을, 그는 이렇게 설명 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 하박국의 노래

 

“저는 설교하는데 한 번도 부담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고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가택연금이 되고 나서 지금까지 다섯 권의 책을 썼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처음 쓴 ‘산 위의 도시’는 2006년 교회 등록부터 시작해 교회로 세워지고 가택연금 직후까지의 내용입니다. 그 속편까지 썼습니다.
그리고 가택연금 후 5주년을 기념해 하박국의 노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책을 썼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책을 쓰는 동안 글을 쓰는 부담이 사라져 이제는 글을 쓰면서 자유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뒤로 한 달간 아가서를 읽고 묵상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와 감동을 쓴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를 출간하였습니다. 또한 교회 수련회에서 매년 가르쳤던 전인 치유 12과목에 대한 책을 정리해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책을 쓰다 보니 한 주가 책 한 장을 넘기듯이 빠르게 지나고 있습니다.”
갇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글 쓰는 일을 통해 얻는 기쁨이 진목사의 얼굴표정에 가득했다. 이렇듯 자신을 통해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하는 진목사의 얼굴은 미소를 가득 머금고 감사와 기쁨이 넘쳐나 어린 아이처럼 해맑게 빛났다.

 

 

감당할 힘을 주시는 하나님!

 

“2014년부터 야외에서 예배하는 성도들을 구류시켰습니다. 그 때 맘이 너무 힘들어 결단을 하고 하나님께 이런 상황을 해결해 주실 것을 아뢰며 21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첫날부터 정말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어렵지 않게 기도했습니다. 아내 외에는 문밖에 있는 경찰들도 금식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저를 보면 ‘얼굴이 수척해졌다’라고만 할 정도로 힘들지 않게 기도를 마쳤습니다. 저는 상황을 완전히 끝내고 정부로부터 교회 열쇠를 받고 싶은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계속 잡혀 들어가 구류 당하고, 저의 가택연금도 풀리지 않았고, 교회 열쇠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문제는 그대로 있는데 하나님은 저와 성도들이 감당할 만한 힘을 주시더라고요. 하나님의 생각과 저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저는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했는데, 7년 4개월 동안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감당할 만한 힘과 능력을 주신다고 고백하는 그의 얼굴은 환하고 평안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감옥에 갇혔으나 나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하다”고 힘주어 강조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이 떠올랐다. 분명 갇힌 자이나 하나님 안에서 자유함을 삶으로 증언하는 진목사의 모습이었다.

 

“중국에는 민간단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단체나 국가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사람이 고통스러우면 눈물을 흘리는데, 너무나 고통이 심하면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저는 몇 년 동안 눈물이 나지 않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얼마나 고통이 심했으면 눈물이 나지 않을까?
자신이 경험한 고통에 대해 적합한 단어를 찾고자 몇 번이나 말을 더듬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진목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고 있다. 바로 중국 교회와 선교 현장을 잇는 선교의 고속도로를 놓고자 하는 꿈이었다.

 

 

중국 교회와 선교 현장을 잇는 다리가 되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가기 전에 중국 교회와 선교 현장을 잇는 다리가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어쩌면 지금까지의 연단이 선교를 대비한 훈련일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이 자신의 생각과는 달랐기에 쉽사리 앞으로의 일을 예단하지는 않지만, 순간순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늘 신뢰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체험한 이야기 중,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신 축복에 대해 들려주었다. 교회가 핍박 받고 가택연금 상황에서 두 명의 자녀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훌륭하게 성장했다. 말씀으로 자라난 것은 물론이고, 미국의 크리스천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학업에 매진하고 있다. 이를 본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행하신 다섯 가지 기적 중에 하나는, 목사님의 자녀들에게 일어난 기적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녀들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놀랍다고 고백하는 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당당하게 밝힘으로 핍박받아 갇혔으나 하나님 안에서 자유하는 기쁨과 평안을 온 몸으로 누리고, 문제가 있으나 그 문제와 직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글 쓰는 것이 십자가였으나 갇힌 중에 글 쓰는 즐거움을 알게 하사 열매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기뻐하고, 도리어 하나님과 함께 선교의 고속도로를 놓고자 꿈을 꾸는 그는 진정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2018년 우리 또한 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이처럼 자유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형제자매님 주안에서 평안을 전합니다!

교회는 2011년 4월 10일 야외 예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7주년을 맞이했습니다. 7년을 돌이켜 보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 오늘까지 버틸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며,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음을 믿습니다. 지난 7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을 구하며 실내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교회장소가 더 빨리 마련되어 그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찬양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인도해 가실지 명확하게 모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명확하게 드러날 때 까지 현재의 상태로 유지할 것입니다.

 

저는 담임목사로 25년을 섬겨왔습니다. 그러나 7년 동안 자택에 감금돼 있어, 형제자매들을 돌볼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가 교회 담임목사를 감당하는 것에 더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하나님께서 2년 전부터 부담을 주시는 선교사역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교회 현재의 사역과 이후의 사역에 긍정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앞으로 섬김 중심의 신학교육이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새로운 종교 사무 조례가 시행되면, 교회가 새로운 싸움에 직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야외 예배와 교회건물 문제에 대해 우리는 계속 하나님께 맡길 뿐입니다. 과거 교회가 걸어온 길은, 이 두 가지 문제의 해결은 우리 누군가 혹은 몇 개 교회 지도자들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사역자들을 계속 이끌어 가시며, 언젠가 시기가 무르익을 때 문제 해결 방법과 길들을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특별히 교회 건물 관련된 사역에 대해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들 사이에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결과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의 행하심에 우리 모두 끝까지 잘 감당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각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에 인도함 가운데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히 인도하시며 형제자매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2018년 4월 24일

■ 이 편지는 탄압을 받고 있는 진목사가 보내온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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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특집1] 북한은 왜 공식적인 교회를 세웠을까?(2018.07)

 

북한이 말하는 체제보장은
곧 수령중심의 세습체제이다!

 

모든 공산주의 국가는 세습을 할 수 없습니다. 세습이 모든 사람이 공평하다는 공산주의 이념과 정면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모택동, 소련의 스탈린도 자식에게 통치권을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북한만 유일하게 3대째 세습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공산주의 나라가 아니고 ‘주체’라고 하는 새로운 사상으로 수령을 신격화함으로 세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북한이 말하는 체제보장은 곧 수령중심의 세습체제를 말하고, 그래서 북한은 미국이 요구한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완전히 핵을 폐기하는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CVID를 수용하면 곧 수령중심의 세습체제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공산주의 국가에서 종교탄압이 자행됩니다. 그러나 말살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해방 이후 그 많은 교회를 깡그리 깨부수고 종교를 완전히 말살시켰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김일성은 분명히 기독교의 정신을 알고 있었고, 그걸 수령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이용했습니다. 해방 이후 철저한 종교탄압 특히 기독교의 말살정책을 꾸준히 단행한 결과 급기야 1968년 김일성은 “우리 공화국에서 종교는 완전히 멸절되었다”라고 천명합니다.

 

 

북한에는 헌법보다 높은 법이 있다!

 

“북한에 정말 신앙의 자유가 있는가?”
“봉수교회, 장충성당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진짜 신자들인가?”
“북한에 가정예배소가 수백 개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한국에 와서 북한을 방문했던 종교계 인사들을 만났을 때 제일 많이 받은 질문입니다.

 

한국의 종교인이 북한을 방문하면 당연히 북한의 종교계 인사가 종교시설을 안내하며 신앙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선전합니다. 종교시설에 가서 종교의식을 참관하고 나면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착각입니다.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에도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지만 북한에는 헌법보다 높은 법이 있습니다. 김씨 3대의 ‘말씀’,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 확립을 위한 10대원칙’, ‘조선노동당규약’과 같은 수령과 당의 정책 등이 그것입니다. 당의 정책은 주체사상 또는 김일성, 김정일 주의만을 믿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므로 북한에서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당의 정책에 반대하는 행위입니다.
북한은 6·25전쟁 이후 미국에 대한 북한 주민의 적개심을 종교에 돌리며 철저히 종교를 탄압했습니다. 교인들은 적대계층으로 분류되며 감시와 통제를 당했습니다. 북한은 종교를 ‘인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도구’, ‘제국주의의 사상·문화적 침투의 도구 내지 앞잡이’라고 공격했고 교회를 ‘인민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사상을 선전하여 퍼뜨리는 거점’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급기야 1970년대 김일성은 ‘북한주민들이 노동당만 믿고 살고 있으므로 종교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랬던 김일성이 종교단체의 활동을 재개시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적화통일의 목적을 위해 말살한
교회건축을 지시한 김일성

 

1980년대 한국에 민주화투쟁의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김일성은 한국 종교단체들이 민주화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보고, 이들을 적화통일전략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려는 목적에 이용할 구실이 필요했습니다. 북한에도 기독교가 존재하고 있음을 내세워 한국의 반정부 종교단체들과의 교류를 확대해 이들을 포섭하려는 속셈으로 1988년에 평양에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건설했습니다. 봉수교회를 건축한 후에 그 주변에 사는 간부 부인들로 가짜 성도들을 조직하고 “교회나 성당에 나와 찬송가를 부르고 종교의식에 참가하는 것은 단순한 활동이 아니다.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투쟁 활동이다. 미제와의 반미 성전에 떨쳐나선 남조선 종교계인사들을 쟁취하기 위한 그리고 조국의 통일을 위한 숭고한 투쟁이다”라고 특별강습도 시켰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들이 교회나 성당에 나오게 하는 것이 어려워 출석부까지 만들어 출석이 저조한 사람은 생활총화에서 자기비판을 하고 호상비판까지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여성들이 ‘아프다. 집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면서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출석에 대한 통제가 완화되었음에도 교회나 성당에 나오는 여성 수는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자발적인 출석률이 100%가 되자 아예 출석부가 사라졌습니다. 종교활동의 좋은 점을 여성들이 느꼈던 듯합니다.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노래도 부르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예배와 찬양을 하는 시늉만 하던 이들이 믿음이 생기자 예배 시간 전부터 교회나 성당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심지어 조금만 아파도 안 나오던 이들이 고열로 끙끙 앓아도 종교 활동은 빼먹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자발적인 모습에서 진짜 신앙이 생겼음을 간파하고 ‘위험 요소’가 돌출되자 당은 교회 주변에 접근하는 사람들 즉 숨어 있는 신도를 색출하기 위해 봉수교회 주변 아파트에 망원경을 설치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들이 일어나고…

 

망원경 설치 후 당에서 놀라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찬송가 소리가 들려오면 청년 몇 명이 나타나 교회 담장에 기대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보위부가 그들을 체포했는데 음악대학 작곡반 학생들이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북한의 음악대학에서 자유주의 국가의 명곡을 가르치지 않았고 행진곡풍의 4/2박자의 곡들을 가르치고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찬송가 선율을 들은 한 음악대학 학생이 그 사실을 급우들에게 알렸습니다. 찬송가를 듣고 채보하고 싶어도 교회에 들어갈 수는 없는 학생들은 담장 밖에서 몰래 찬송가를 듣고 채보하다가 보위부에 붙잡힌 것입니다. 이 학생들은 보위부의 경고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그 다음 목격된 사례도 당으로서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종교의식을 하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그 옆길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체포해 조사해 보니 예전부터 믿었던 신자였습니다. 김일성은 북한에 더는 신자가 없고 종교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선언했지만 교인들의 신앙이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들은 당국의 탄압이 두려워 신앙을 버렸다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1991년 외교적으로 고립상태에 놓였던 김일성은 얼마나 다급했는지 교황이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 뉴스를 보면서 교황을 북한에 오게 한다면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기대했습니다. 그리하여 1991년 외무성 내에 교황을 평양에 초청하기 위한 상무조가 만들어졌는데 이때 나는 상무조의 일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바티칸 교황청에서 “북한에 진짜 카톨릭 신자가 있다면 바티칸에 데려와 달라”고 요구하자 북한 노동당 카톨릭교협회가 사회안전부 주민등록부를 뒤져 6·25 전쟁 전까지 독실했던 신자 할머니를 찾아냈습니다. 노동당의 카톨릭교협회 간부들이 할머니를 찾아가 “아직도 하느님을 믿느냐?”고 묻자 할머니는 “수령님과 노동당이 있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고 정색하며 대답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다. 아직도 하느님을 믿는 신자를 찾아 로마 교황청에 보내야 할 필요성이 있어서 물어보는 것이다. 독실한 신앙인을 찾아내면 당과 국가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하자 할머니는 그때서야 “한번 마음속에 들어오신 하느님은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 간부는 할머니에게 어떻게 신앙을 지켜왔는지 물었고 할머니는 그들을 집 뒷담으로 데려가 뒷담 앞에 꾸려진 예배단으로 데려갔습니다. 당 간부는 할머니가 신자임을 확신하고 “혁명의 이익을 위해 대표단 성원으로 바티칸에 한 번 가셔야 되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 일생을 열심히 기도를 드렸더니 이렇게 어린 양을 불러주시네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일을 통해 노동당은 종교의 ‘무서움’을 절감했습니다. 교황이 평양에 오면 실제로 북한에 카톨릭 열풍이 일 것을 두려워한 북한은 더 이상 교황 초청을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10개 교회를 지으려던 계획이 중지되었다!

 

김일성은 봉수교회 외에도 원산이나 강계 등 지방 주요도시에 10개 교회를 건축하라고 지시를 했지만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통해 주민들의 사상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우려해 더 이상 교회나 성당을 세우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 지방에 교회나 성당을 지었다가는 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 같은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에 각 지방과 도시마다 많은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면 북한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한에 더 많은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들이 힘을 써야 합니다.

 

 

 

북한이 언제 무너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 언제 북한의 문이 열릴 것 같습니까?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북한의 문이 열릴까요?”
여러분이 가만히 기도만 하고 있다면 북한의 문이 언제 열릴지 모릅니다.
김정은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정보가 차단된 북한주민들에게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한국을 비롯한 외부 세계의 실체를 북한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통치기간에는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흔들리는 상황이 와도 외부정보유입차단, 이동통제, 세뇌교육, 정치조직생활 등으로 체제유지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은의 시대에는 이런 것들이 다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의 인기 드라마나 영화가 DVD나 USB 형태로 몇 주 안에 북한 장마당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북한주민의 생활이 윤택해져서가 아니라 10여 년 전부터 전력사정이 악화돼 TV를 마음대로 볼 수 없게 되자, 중국기업이 대체할 영상물이 필요한 것을 간파하고 12볼트 배터리로 DVD나 USB를 재생하는 미디어플레이어 ‘노텔’을 생산해 북한에 유통시켰습니다. 노텔은 하루에 1~2시간만 전기가 들어와도 배터리 충전이 가능해 설령 정전이 되어도 장마당에서 새 배터리를 구입하면 됩니다. 가격도 30달러~70달러까지 저렴한 편이어서 북한의 거의 모든 가구가 노텔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DVD나 USB에 담긴 한국 콘텐츠가 북한전역에 무차별하게 퍼지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휴대폰의 도입으로 가격과 수요에 대한 정보공유가 북한 전역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북한의 가족이 북·중 국경지대에서 휴대폰으로 한국의 탈북자와 통화도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어용이라 할지라도 북한에 많은 교회가 세워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양질의 콘텐츠를 제작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북한내부로 들여보내야 합니다. 이러할 때 북한주민들의 의식이 변합니다. 의식이 변하는 것은 어느 순간에 엄청난 폭발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태영호공사가 북한에 봉수, 칠골교회가 세워진 역사적 배경과 그 일을 통해 일어났던 놀라운 일들을 전하면서,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더 많은 교회를 북한에 세워야 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양질의 콘텐츠를 제작해 지금 북한 내부로 투입해야 함을 강조하고 당부한다. 이는 그만큼 북한선교가 다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무뎌져 미동조차 하지 않는 우리를 향해 나귀의 입을 통해 발람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깨우시고 도전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의 소리로 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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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특집2] 목숨 걸고 기도하라! 선교자체가 모험입니다!(2018.6)

 

2016년 11월 7일, 아침 7시,
전날 밤 북경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중국 북쪽에 위치한 OO기차역에 도착해 광장으로 나가니 미니버스를 가지고 마중 나온 형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마음 속으로
‘이 분들은 재정이 넉넉한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은 차를 타고 ‘사슴의 지역’이란 뜻을 가진 곳에 위치한 선교훈련센터로 향했다. 그 곳에 도착하니 우리 일행을 맞이한 여인이 식당으로 데려갔다. 식탁에 둘러 앉아 서로를 소개하는데 그 여인이 바로 선교훈련센터의 책임을 맡고 있는 양교사였다. 그 분에게 어떤 분들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느냐고 물었다.

 

“13명이 있는데 부부 또는 개인이고 숙식을 함께 하면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처럼 외부강사의 특별강의가있을 때는 연합사역을 하는 교회의 목회자와 교육받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청강생으로 함께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운영에 어려움이 따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선교에 헌신해 직장을 그만두고 훈련 받는 훈련생들이 너무 귀해서 훈련비, 숙식 등이 모두 무료입니다. 훈련생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면 먹고 그렇지 않으면 뜨거운 물 한 컵을 마시며 하나님께 감사하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먹을 것이 없어 굶은 적이 없고, 야채, 고기 등을 보내주는 분들이 있어 풍성한 식탁이 차려지고 있습니다.” 여인의 몸으로 선교센터를 맡아 운영하는 양교사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저는 1989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스무 살이 조금 지났을 때 예수를 믿었는데 마을에 교회가 없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6개월 만에 하나님께 삶을 온전히 드리기로 헌신하고 3개월 성경학습을 마치고 돌아와 성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 사역을 시작해 교회가 계속해 확장되어 26년간 목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의 농촌지역에서는 예수를 믿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 드리고 목회를 시작한 양교사와 같은 목회자들이 많다. 그런 그녀가 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순종한 결과였다.

 

“10년 전부터 이 지역 교회 지도자들을 동원해 전 중국으로 복음 전하러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주를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바라볼 때 아픔이 느껴져 교회 오시는 분들과 선교에 대해 나누며 동원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15년 하나님의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선교팀이 교회를 방문해 집회를 하는데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마음이 선교지로 간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매일 가슴에 손을 대고 기도하며 “주님,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더 이상 선교를 늦출 수 없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2015년 4월이었습니다. 그때 여러 명이 동시에 저를 찾아와 5월 1일 이전에 무조건 선교학교를 해야 한다고 들려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4월 28일 종이를 펼쳐 놓고 ‘OOO선교센터’라고 썼고, 저를 찾아온 분들이 같이 서명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가가호호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지역에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고 10개 교회가 연합해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저와 함께 동역하는 분들 모두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만 바라보며 한걸음씩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곳 선교훈련센터입니다.” 그녀는 참으로 감격에 차서 기뻐하며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렇다면 선교센터는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지어져 훈련생들을 모집해 훈련까지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큰일을 이루시는 것을 봤습니다. 센터를 세울 계획을 하고 기도할 당시 저희에게 2천 위안(한화 34만원)이 있었습니다. 돈이 없지만 믿음으로 4월에 시공을 시작했는데 3달 후인 7월에 완공이 되었습니다.” 우리 눈에 들어온 건물의 규모가 꽤 크게 보였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란 우리의 표정을 보며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웃으며 그녀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건축물이 완공되었지만 내부가 완전히 텅 비어 있어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기묘하게 일하셨습니다. 양회에서 건물이 완공된 것을 보고 놀라 “이렇게 작은 농촌교회가, 연약한 자매가 이런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니~~~”라며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종이 한 장을 가져와 펴 놓고는 “방이 몇 개냐? 주방은 무엇이 필요하냐? 숙소는 몇 칸이고, 침대는 몇 개나 필요하냐? 교실 책상과 의자는 몇 개나? 컴퓨터, 빔 프로젝터, 칠판… 저희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들까지 모두 기록하더니, 양회 회계부에 가서 목록에 적힌 것들을 구입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받아가라고 했습니다. 자그마치 그 돈이 9만 위안 이상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센터의 필요한 모든 물품들이 가장 좋은 것으로 구비되었습니다. 정말 꿈꾸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놀라운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건물이 구비되었는데 누가 와서 훈련을 받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의 부담이 되었습니다. 기도하면서 몇몇 교회 동역자들에게 7월 15일 개강한다고 알렸습니다. 그래 놓고도 제 마음에는 계속
‘누가 올까?’염려가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7월 13일~14일에 훈련생을 모두 채워주셨습니다.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왔는데 무엇을 가르쳐야 할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1년 4개월이 지난 오늘까지 선생님이 없어 강의가 중단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학생들 모두 직장을 그만두고 이 곳에 와서 훈련을 받는 것만으로도 귀해 학비, 숙식비 모두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선교에 헌신된 학생들에게 “목숨을 걸고 기도하라! 우리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은 매일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어떤 이는 돼지 1마리, 양 2마리 등을 보내주기도 하고, 냉장고에 빈자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타고 온 미니버스는 얼마 전 연합하고 있는 10교회가 한 주를 차량헌금으로 드렸는데, 30만 위안이 모아져 며칠 전 구입한 버스입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놀랍습니다. 선교자체가 모험입니다.”

 

이는 선교훈련센터의 학생들에 대한 강의가 진행되는 1주 동안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사도행전적 역사가 중국 북쪽에 위치한 한 지역에서 오늘도 계속해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 목숨을 걸고 기도하며 선교훈련을 받는 이들을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곳마다 선교의 부흥이 타오르게 하실 하나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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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특집1] 중국농촌 가정교회 지도자를 훈련합니다!(2018.06)

 

하나님은 모퉁이돌선교회로 1985년 성경배달을 시작하게 하시고 10년이 지나가면서 중국교회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셨다. 2000년부터 중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성경중심의 신학교육을 가르치는 신학교배달사역이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본회가 강사, 재정 등에 있어 대부분 지원하는 형태로 운영되었으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자립도를 높여가 현재는 중국교회가 강사와 재정 대부분을 감당하고 있다. 지금은 A도시에 위치한 본교를 중심으로 신학교사역이 자체적으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이 사역은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신학교배달사역이다. 이제 다른 형태의 중국농촌가정교회 지도자훈련이 준비되고 있다.

 

4년전의 일이다. “선교사님, 걱정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중국농촌가정교회의 큰 그룹을 대표하는 목회자가 찾아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고 묻자 “저희 단체 안에 이미 목회하고 있는 수백 개 교회 목회자들을 위한 재교육이 필요한데, 그 목회자들에 대한 재교육을 선교사님이 해줄 수 없나요?”라고 정중하게 요청을 해왔다. 이유를 물으니 자신의 그룹에 속한 목회자들 대부분이 학력이 낮고,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인해 체계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못해 힘들어하는 목회자들을 보며, 그룹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로서 목회자들이 재교육을 통해 영적, 육적으로 돌파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못함이 매우 안타깝다고 말해 주었다.

 

 

중국 가정교회의 현실

 

현재도 부흥하고 있는 중국교회의 성도는 대략 1억에서 1억2천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교회의 시발은 농촌지역에서 시작되는데, 농촌과 도시교회의 비율은 7:3 내지 8:2로 농촌교회가 월등하게 높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국농촌교회 사역자들의 대다수가 정규신학교육을 받지 못했다. 3년전, 농촌가정교회 지도자훈련을 위해 설문을 받아 보니 대졸자 10%미만, 고졸 10%내외, 60%이상이 중졸과 초등졸이었고, 놀랐던 것은 체크를 안 한, 즉 학력이 없는 목회자가 20%가 넘었다.

 

이는 비단 우리가 조사했던 그룹만이 아닌, 농촌교회의 여러 환경상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정규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농촌 가정교회에서 목회중인 사역자들이 좀 더 체계적인 학습을 통하여 섬기는 교회에 유익이 되며, 또 섬기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어 하나님 나라 건설에 쓰임 받게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농촌가정교회 목회자들을 위한 재교육 요청을 받고 기도하던 중, 본부에서 준비하여 현장에서 잘 운영하고 있는 평양국제성경학교 신학프로그램을 중국에도 접목하면 좋겠다는 본부의 제안이 떠올랐다.

 

그러나 대상과 환경에 있어서 북한과 중국이 달라, 기존 평양국제성경학교의 내용들을 일괄적용하기에는 부적절함을 파악하고, 1년에 걸쳐 중국의 7개 지역(북경, 상해, 산동, 산서, 절강, 하남, 사천, 운남)의 대표적인 현지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교 교수진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현지 가정교회가 직면한 문제와 신학교육의 현주소를 파악하였다. 50개 문항의 설문지를 만들어 현지 목회자들에게 배포한 후 설문지를 회수하여 분석해 보니, 농촌의 사역자들 대부분이 교회에서 생활비 지원이 되지 않아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의를 지속해서 듣기 어렵고, 인터넷 사용은 물론이고 타이핑도 어렵고 레포트 제출을 힘들어하여, 기존 신학교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아무리 좋아도 농촌지역 사역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농촌가정교회 목회자들의 상황에 대하여 B시의 모 신학교 원장(미국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음)을 찾아가 나누고 강의를 부탁했다. 그는 “저는 강의를 못하겠습니다. 제 강의에는 영어와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 등이 많이 포함되기 때문에 농촌지역 목회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강의를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현재 목회를 하고 있으면서 농촌 배경을 가지고 있는 목회자들이 강의하면 좋겠네요”라고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4개 국외신학교가(대만 China Evangelical Seminary, 미국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Covenant 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 Third Millennium Ministries)가 중국 내 신학교육(오프라인, 온라인)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학교를 조사한 결과 현재 중국교회에 적합한 신학교육방안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건 오프라인과 온라인학습의 단점을 보완한 신학교육이었다. 오프라인 신학교를 운영하기에는 이미 중국내에는 삼자든 가정교회든 다양한 신학교가 존재하고 있고, 온라인신학교육은 온라인의 장점도 있지만 학력문제, 학습문제, 인터넷 환경 등이 열악해 이용이 어려운 상황이어서, 이를 보완하여 오프라인교육에 시청각교육을 병행한 교육방법을 모퉁이돌선교회에서 개발하게 되었다.

 

 

농촌가정교회 목회자들의 눈높이에 맞는 지도자훈련 방안모색

 

강의를 듣기 위한 선행조건으로 10명 이내의 학습반(지역 환경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만들어지고 각 학습반에 2~3개의 조가 구성되며 각 반에 현지 교단에서 추천 임명된 학습반장을 통해 강의 전체 진행을 돕게 한다. 매과목 30시간의 학습시간을 통해 3학점의 학점이 주어지는데 매시간 25분 단위로 2강좌가 진행되며, 매강의에는 2~3개의 토론제목이 주어져 강의 후 반장의 인도 하에 조별 토론과 발표를 하고, 기도회로 매강의를 이수하게 된다. 50분의 강의지만 토론과 발표, 기도회 시간이 추가되면 실질적으로 2시간짜리 강의와 맞먹는 분량이 된다.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가 아니고 토론과 발표, 기도회가 있어 단순히 이론적인 신학교육을 받는 차원이 아니라 강의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영적인 향상까지도 가능하다. 또한 이론에서 탈피해 참석자에게 실질적인 커리큘럼을 제공하여, 수강 후 바로 목회현장에 적용되도록 설계함으로, 농촌의 목회자들에게 실질적인 재교육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정의 과정을 이수(매10과목 이수 시, 목회증서, 사역증서, 신학증서 수여)케 하여, 상급학교로 진학을 원할 시 학점이 인정되어 학사관리를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현지 목회자 눈높이에 맞는 강의안이 나오기 위해, 특별히 현지교수진들이 배양되고 있으며 금년 10월부터 현장에서 강의가 시작되도록 준비 중에 있다.

 

 

이것이 지금 중국교회에 필요한 지도자 훈련이다!

 

특히 올해 2월, 종교법이 새롭게 개정된 이래로 중국 교회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의 개입에 대해서도 당국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졌다. 또한, 이제는 종교부서뿐만 아닌 현지 동사무소도 교회를 제재할 수 있게 되어, 3월에 북경시에서는 각 동사무소 담당자들이 기독교 집회 장소를 색출하러 가가호호 방문하라는, 공문이 하달되었고 U지역에서는 교인인척 끄나풀로 심어둔 자들로 인해 예배 드리다가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고, W지역에는 교회 앞에 감시용 CCTV가 달리고, J지역 당국은 삼자교회에서 십자가와 성경구절 등을 다 떼어내고 정부출판이 아닌 성경은 모두 몰수하는 등, 중국 내에서 강경한 단속이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급변하는 중국의 종교정책으로 인한 교회집회의 어려움과 목회자 양성에 비상이 걸린 현 상황에서 금번 과정은 하나님께서 4년 전부터 예비해주신 중국을 향한 하나님의 도구임을 알 수 있다. 강의를 소개 받은 각 지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때를 위해 준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고백을 하며, 증서과정에 학력을 요구하지 않는 입학조건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실제로 한 그룹에서 준비된 강의를 보여줬더니, 그들 중에 50대의 목회자 3명이 “이해하기 편하고, 토론할 수 있어 좋고, 우리에게 학력을 요구하지 않아서 좋다”라고 세가지 이유를 말하며 좋다고 했다. 환경상 세상의 학력을 받지 못하였지만 이미 이들은 교회의 인정을 받고 목회자로 기름 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기에 본 과정 입학조건에 부합되어진다고 본다.
참고로 본 과정의 입학자격은 목회를 한지 3년 이상이 된 사역자로서 강의에 참석할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쓸 수 있으며, 교단에서 추천하는 목회자이다. 이미 세우심을 받은 목회자라면 설교자이기에 말 할 수 있고, 설교를 준비하여야 하기에 글을 쓸 수 있고, 성도들을 목양하기에 리더십 등이 이미 검증 되었기에 세상에서 요구하는 학력을 반드시 요구하지 않았다. 이미 이분들은 하나님 나라의 학력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질적이고 체계적으로 말씀공급을 받은 목회자들은 먼저 자신의 영적생활에 변화를 갖게 되어 바로 설교가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하여 말씀을 받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건강해지고 나아가 교회까지도 건강하게 되어 선교중국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기대한다.

 

그간 교수요원으로 배양을 받은 한 목회자가 “강의안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영적상황과 설교가 달라져 성도들이 자신의 설교 듣기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고백처럼, 본 과정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분명하기에 이 과정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셨고 행하심을 확신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역할을 잘 감당할 사명이 남아 있을 뿐이다.
처음 농촌가정교회 목회자들의 재교육을 요청했던 리더에게 “우리가 곧 농촌교회 지도자훈련 프로그램을 완성해 진행할 것인데 그 단체에서 어느 정도 이 프로그램을 가져다 쓰겠습니까?” 물었더니 “11개 지역에 14개반, 42개 소그룹에 9명의 반장”을 임명해 주었다. 이 그룹만 해도 120명이 넘는 목회자가 신학교육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가뜩이나 목회자들이 부족한 중국교회 현실에서는 중국가정교회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교회들이 흩어지기 시작하게 되어 목회자나 지도자를 양육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중국농촌가정교회 지도자훈련(JIBC)을 통해 수많은 목회자들의 재교육이 이루어져 건강한 중국교회가 세워지고, 나아가 세계 열방을 향해 복음전하는 중국교회가 되도록 모퉁이돌선교회를 불쏘시개로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김베리(파송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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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소식 2018.5. 특집 2] 휴전선을 돌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2001년, 모퉁이돌선교회의 여리고 기도사역이 시작되었다. 여리고성을 열 세바퀴 돌듯이 국내와 국외에서 북한 땅을 감싸고 기도하는 여정이었다. 국외 변방팀은 인천에서 출발하여 중국 변방을 거쳐 러시아 최남단을 지나 배를 타고 속초로 도착하기까지 기도하는 동안, 국내에서도 휴전선을 돌며 기도하면서 북한 땅 전체를 감싸는 기도사역을 2005년까지 13회 진행하였다.
그 이후에도 변방과 휴전선을 돌며 기도하는 사역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중국변방에서의 선교활동이 어려워지면서, 휴전선을 따라 북한을 직접 바라보며 하는 기도사역이 활발히 이뤄져야만 한다. 특별히 북한을 직접 보며 기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크다. 기도사역에 참여한 동역자들은 한결같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저는 선교사임에도 북한이라는 존재자체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통일이 되어도 사상이 달라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제가 북한에 대한 공부를 하고 알아가면서 그동안 너무 관심이 없었던 저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나아가 북한의 죄악을 대신하여 회개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여기서 북한을 위해 기도할 때 막연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굉장히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한 전망대에 가서 가까이 있는 북한을 보며 기도할 때 눈물이 나고, 북한은 우리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민족이라 생각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직접 가서 보며 기도해 보십시오. – 강OO

현재 강선교사는 본회 기도자로 헌신해 매주일 시간을 정하여 기도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억눌렸던 것들이 풀어지는 자유를 누립니다!

 

휴전선 기도 3번 참여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휴전선 기도사역에 참여하면서 억눌렸던 것들이 풀어지고, 평강의 하나님과 함께 자유를 누리는 복을 맛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만물을 보며 창조자 하나님께서 휴전선을 따라 통치하심을 높이고 찬양하는 은혜를 누리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땅을 밟으며 기도하니 영적인 것들이 느껴지고 무엇보다 군인교회에서 기도할 때 군복음화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 군인교회를 갔을 때 오전에는 카톨릭, 오후에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교회가 타종교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진 영역을 빼앗기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어느 군인교회에 갔을 때 그 부대를 통솔하는 최고지휘관이 신실한 믿음으로 500여 명의 군인들과 예배를 드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군의 리더들이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지도록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김O선

나라와 민족 그리고 북한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기뻐 받으시는 동시에 기도자의 개인적인 삶의 문제들도 해결해 주시는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끝없이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휴전선 3번, 중국변방기도사역에 4번 정도 참여했습니다. 국내와 국외 모두 기도사역 자체가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증인으로 불러주신 것이기에 은혜이고 감사입니다. 특별히 최근 미국인들과 함께 7명이 휴전선을 돌며 기도하면서 끝없이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 나누고 찬양했습니다. 군인들과 함께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이 땅에 기도의 용사들이 일어나도록, 온 땅에 성령의 비로 새 생명이 자라도록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나눠지는 큰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큰일을 행하시는 그 자리에 서게 하시고,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을 이 땅에 부르셔서 기도케 하심이 감사했습니다. 이 나라의 상황을 보며 탄식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음을 선포하며 하나님을 높이도록 연약한 저를 부르셔서 함께 동역하게 하신 하나님이 너무나 좋고 또 찬양합니다. – 조O연
기도자들이 연합하여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또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이러한 기도야 말로 막힌 남과 북의 벽을 무너뜨릴 하나님의 강력입니다.

 

 

아버지 마음으로 그 땅을 사랑하니 거듭 기도하러 갑니다!

 

휴전선을 돌면서 2박3일, 1박2일, 당일로 기도하는 사역에 참여했습니다. 어딜 가든지 북한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농사하는 북한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서로의 움직임을 살피려고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둔 지역이 모두 태워져 허허벌판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처음 기도할 때는 “아,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저들이 사는 땅의 결과가 이렇게 황폐한 것이구나~”하는 마음으로 다녔습니다. 그런데 10년 정도 지나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저 땅을 통해 열방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이시고, 저 북한 땅은 순교의 피가 차기까지 하나님이 역사하는 땅이구나~”하는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바꿔주셨습니다. 결국은 북한성도들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이스라엘까지 복음을 전할 군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는 제가 생각으로 “하나님 이렇게 일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데 휴전선 부근으로 가서 북한을 바라보고 기도하노라면 제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고, 북한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니까 그 땅을 향하신 아버지의 마음이 더 알아지고, 그 땅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알아지니까 저도 그 땅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거듭 기도사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 홍O희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강합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구하며 기도할 한 사람이 되어 휴전선 기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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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소식 2018.5. 특집 1] 북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평창동계올림픽을 전후해 시작된 남북 예술단의 공연과 고위급 회담 등이 이어지면서 남북관계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에 대한 지지와 우려의 목소리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북한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백성들이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서울의 한 학교에서 진로상담을 지도하는 탈북민 교사, 이 데보라(가명)선생을 만나 그가 북한에서 직접 보고 겪었던 실상을 듣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마치 하나님께서 “내가 존귀하게 여기는 백성들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알고 기도하라”는 음성처럼 들려졌다. 그 내용은 끔찍했다. 동역자들에게 함께 기도하기 원하여 정리하였다.

 

“저는 8·18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던 1976년 평양의 김형직 사범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대학이 5년제였는데, 4년을 공부했을 때 국방과학원에서 재직하셨던 아버지의 과오로 인하여 온 가족이 함경도로 쫓겨났습니다. 저의 성적은 최우등이었지만 아버지 문제로 인해 모든 길이 막혀 지방학교에서 10년 정도 교원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마저도 굶주린 가족들을 살려야 했기 때문에 학교를 퇴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팔려가는 여인들

 

1992년의 일이다. 당시 이 선생의 월급으로는 쌀 2kg 밖에 살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부모와 형제들이 일하는 곳에서 돈을 받지 못해 고난의 행군이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이선생의 가족에게 닥쳤다. 이선생은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해 고난의 행군시기 가족을 모두 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장사를 잘하고 있을 때 가택수색을 당해 6개월 동안 어려움을 겪었고, 사기를 당해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런 참담한 상황에서 누군가 중국에 가면 국수장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5~6개월 열심히 돈을 벌면 다시 장사를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강을 건넜다.
그러나 이선생은 강을 건넌지 하루 만에 중국 돈 300원에 팔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함께 강을 건넜던 남자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당시 40세였던 이선생과 함께 28세, 22세, 17세의 여자들은 깊은 산골짜기의 비닐천막으로 갔고 그 곳에서 또 다시 중국 돈 3천 원에 팔렸다. 중국말을 한마디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명씩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이가 많았던 이선생은 제일 늦게 농촌마을로 팔려갔다. 농사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이선생은 몇 년 동안 죽도록 일만 하다가 잡혀 북송이 되었다.

 

 

잡혀가는 여인들

 

“2008년 3월 30~31일 이틀 동안 전국적으로 탈북자들을 검거했습니다. 제가 잡혀갔던 도문변방구류소에도 잡혀 온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배가 남산만 해서 잡혀온 여자가 아프다고 소리쳤습니다. 저는 속으로 ‘산통이 시작된 저 여자는 운이 좋아 풀려나겠구나’ 했는데 4월 12일 북한 보위부에서 하루 조사를 받고 온성 노동단련대로 끌려갔을 때까지도 그 때까지도 그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아프다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4월 15일 그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즉시 아이를 헌 담요에 둘둘 말더니 산에 가져가 생매장하더라구요.
또 한 여자는 간질로 까무라치곤 했는데 심리적 압박이 심해지니까 북한보위부에 가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간질증상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감옥 안에 발진티푸스로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 송장을 치워야 할 지경이 되자 그런 여자들 40명을 청진 역에 갖다 풀어놨습니다. 그 여자가 거기서 발작을 하고 죽었습니다.” 하던 말을 멈춘 이선생은 깊은 한 숨을 내쉬더니 “북한여자들의 운명이라는 것이 기가 막혔습니다”라고 했다.

 

 

강제로 죽임 당하는 아이들

 

“그 때 끌려온 여인들 중에 유독 임신한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1994년 김일성이 죽고 난 후 1996~98년이 제일 어려웠는데 이때 탈북한 젊은 여자들 90% 이상이 남자들에게 팔려갔습니다. 젊은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팔려갔으니 잡혀온 여자들 60% 정도가 임신상태였습니다. 이들 중에 만삭인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배가 볼록 솟아 있는 임산부들까지 모두 끌어가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로 낙태를 시켜버렸습니다.”

 

만삭이었던 3명은 청진집결소로 보내졌는데, 그 중에 함흥의대 출신의 산모가 있었다고 한다. “산모가 설사하면 죽는다는 것을 그때까지 몰랐습니다. 함흥의대를 졸업한 그 여자가 아이를 낳은 지 1주일간 설사를 해 생명이 위험하니까 집에 연락해 가족들이 데려가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낳은 아이가 죽지 않으면 산모도 나갈 수 없었습니다. 살아 있는 아이를 두고 나갈 수 없으니 어떻게 죽였는지 알아요?”
이선생은 깊은 한 숨을 내쉬더니 혀를 끌끌 찼다.
“얇은 비닐을 물에 적셔 갓난 아이 얼굴에 덮었습니다. 한주동안 끼고 있던 아이를 그렇게 죽이고 나갔습니다. 그 때 태어난 아이 셋이 다 그렇게 죽었습니다.”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탈북을 결심해 중국까지 넘어와 인신매매로 팔려갔다가, 잡혀 북송 된 많은 여인들은 사람으로 인정되거나 존중 받기를 포기해야만 했다. 이 보다 더 가혹한 고초를 겪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한국으로 가려다 잡혀왔거나 교회 가서 기독교를 접한 것이 드러나면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다.

 

“중국에 다시 나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잡혀갔을 때, 길주에서 온 한 아줌마가 있었습니다. 보위부 감옥에서 조사를 받고 노동단련대로 가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보위부원들이 뛰어와서 대열에서 길주아줌마를 끌고 갔는데 누군가 그 아줌마가 교회 가는 것을 봤다고 고발해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때 교회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선생은 그 후에도 한국에 가려다 잡혀 온 두 가족을 만났다. 정치범으로 분류된 그들을 감옥에서는 한 곳에 두지 않고 가족들을 흩어 호실마다 분리해 수용하면서 관리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4번을 탈북해 3번을 잡혀 북송 되었던 이선생은 무슨 말을 하려다 목이 메여 멈추었다. 붉어진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휴지를 건네니 받아 눈물을 닦아 내며 깊은 숨을 토해내더니
“족쇄를 차고 북한에 북송되어 가면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생각했습니다. 나라 잃은 사람의 설움이…”

 

나라가 백성을 보호하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로부터 무자비하게 당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고 했다.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녀에게 북한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 세계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수령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불쌍합니다. 통일은 하나님 계획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통일을 주실 때까지 어떻게라도 북한의 백성들이 모두 살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는 한국에 와서 처음 급식시간에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 준 쌀을 가지고 북한아이들을 한 끼라도 먹게 했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밥 한 그릇이 없어 굶어죽은 아이들이 많은데…’하는 생각을 하니 밥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선생은 3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고 지금도 교도소,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지?’라고 가슴치며 답답했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택해주시고, 훈련시켜 통일시대 북한에 가서 사역자로 쓰시려고 살려준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이선생은 이야기를 나누며 “통일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라도 기도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라는 말을 거듭해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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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소식 2018.4. 특집 2] 온 교회 성도들이 복음풍선을 보내는 사역자들입니다!

 

 

Q1. 복음풍선사역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저는 하나님께 “왜 나를 이곳으로 부르셔서 교회를 세우도록 하셨습니까?” 기도하며 묻습니다. 사실 저는 강권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서 십자가를 세우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3년 전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북한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을 아시는 K 목사님이 모퉁이돌선교회를 소개해줬어요. 그 후에 저에게 계속 영상 링크를 보내줬지만 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은 그 분이 직접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나서
“이게 진짜일까? 북한 성도들의 상황이 좀 어렵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진짜일까?”라고 물으니, 그분이 “진짜야”라고 대답했어요. 핍박 받는 북한성도들의 영상을 보며 ‘이게 진짜면 내가 정말 죄짓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그 때부터 가능한 대로 돈을 끌어 모아 북한성도들에게 성경 보내기에 동참했습니다. 길이 뚫려 있다면 한 시간만 달리면 발 닿을 곳에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고통 당하는 저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부르신 우리교회의 사명으로 복음풍선사역을 시작한 것이 3년이 되었습니다.

 

Q2. 지금까지 혼자 사역을 해오셨나요?

 

저희 부부와 어머니가 복음풍선을 보냈는데 지난 해 집사님 두 분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한 분은 고향인 부산으로 가고 싶어 기도해도 계속 길이 막혀 어려운 시기를 보내며 영적으로 갈급해 하던 중에, 시장에서 저희 어머니로부터 ‘우리 아들 교회에서 매일 밤 9시에 기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셔서 등록까지 하셨습니다. 복음풍선 사역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하나님이 왜 그렇게 부산에 가는 것을 막으셨는지 이제야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분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금년에 두 분의 성도들을 다시 보내주셨습니다.

 

Q3. 매일 밤 기도와 사역을 병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나요?

 

기도만 할 때는 실제적으로 북한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지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북한에 보내는 실제적인 사역을 기도와 함께 하니 훨씬 더 힘이 나서 할 수 있었습니다. 사역은 드러내지 않고 조용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머니와 성도들이 복음풍선에 가스를 넣는 작업을 하고 어느 정도 불어지면 제가 봉고차에 가득 싣고 미리 확인해 두었던 장소에 가서 바람을 확인한 후 재빨리 보내고 다시 교회로 와서 풍선을 차에 싣고 또 다른 장소로 가서 날리는 방법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좀 급해서 올 겨울 내내 바람 방향을 지켜봤습니다. 그 동안 겨울에는 북쪽으로 가는 바람이 없어 사역을 하지 않았는데, 지켜보니 일기예보상으로 심심치 않게 북으로 부는 날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밤에 한번씩 연탄을 갈아야 해서 굴뚝의 연기로 바람 방향을 살펴봤는데 북으로 부는 것을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Q4. 사역하면서 누리는 은혜들을 나눠 주시지요?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복음풍선사역을 하러 온 자매에게 “오늘 북풍이니까 날리면 되는거야!” 자신 있게 말했는데 바람이 계속 남쪽으로만 부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오늘 분명 북풍이었는데…’ 하면서 장소를 계속 옮겼어요. 그러자 자매가
“목사님, 북풍이면 남쪽으로 가는 거 아닌가요? 지금 풍선이 남쪽으로 가잖아요. 북풍이면 남쪽으로 가는 게 맞아요” 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에이~ 무슨 소리에요. 북풍이면 북쪽으로 부는 게 맞아요. 제가 2년 동안 날리고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세요. 확실해요~” 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자꾸 자매가 했던 말이 맴돌아 기상센터에 전화해서 “일기예보에서 북풍이라고 표시되면 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부는 것인가요, 아니면 북쪽에서 남으로 부는 것인가요?”라고 물었더니 “네, 선생님이 말씀하신 후자가 맞습니다. 바람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부는 것을 북풍으로 표기합니다.”라고 하는데 기가 막혔습니다. 처음에는 창피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잠깐이었고, “하나님! 그동안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셨군요, 무지해서 북풍일 때 풍선을 보냈는데 지난 2년 동안 하나님께서 바람을 불게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이 사역은 풍랑이 이는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셨던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으로 된 것입니다. 그 역사가 오늘도 이 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어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Q5. 은혜로운 고백이네요. 앞으로 언제까지 이 사역을 하실 건가요?

 

통일이 될 때까지 이 사역은 계속 할 것입니다.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라면, 지금 마음 속에 그리는 것은 이 지역이 한반도 정 중앙에 있으니 북한 성도들을 훈련시켜서 재파송할 수 있는 사역이 가능하도록 준비하고자 합니다. 또한 저는 물자 수송이라든가, 보관을 해서 넘겨주는 것을 감당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그들을 훈련시키고 양육시킬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을 갖춰서 감당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은 있습니다.

 

Q6. 마지막으로, 기도제목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서울에서 가스를 가져 와야 해서 3시간 걸리는 장거리 이동인데 혼자보다는 가스통을 싣고 내리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형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끔은 일정 때문에 가스통 교체를 못할 때에는 누군가 대신 맡아줄 사람이 있으면 사역이 훨씬 더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꾼을 보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어요. 이 사역을 귀하게 여기고 마음을 함께 할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L 목사로부터 사역에 대해 들으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주님의 손에 드렸던 소년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믿음으로 부르심에 순종한 그를 어여삐 여기시고 2년 동안 바람이 남쪽으로 부는 북풍 일기예보를 듣고 날렸음에도 그 바람을 북으로 불게 하사 사역이 가능하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금년에도 철원의 이 교회와 같이 제2, 제3의 교회들과 함께 복음풍선을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북한에 직접 갈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바람을 타고 북한 방방 곳곳에 떨어져 성도들과 주민들의 손에 들려지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가 드려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눅 8: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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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소식 2018.4. 특집 1] 선교현장에 가지 않고 북한선교 할 수 있습니다!

 

 

“앞문이 닫혔으면 뒷문으로,
뒷문이 닫혔으면 불을 질러 나오게 하고,
안나오면 공중으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라.”

 

이는 지난 33년 동안 북한선교를 감당해 온 모퉁이돌선교회 이삭목사의 고백이요 선교전략이다. 복음이 극도로 제한된 북한선교를 함에 있어 모퉁이돌선교회는 다양한 전략과 창의적인 선교방법을 동원해 사역을 감당해 왔다. 그 중 에 하나가 바람을 이용해 북한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는 ‘민들레사역’으로 불리는 복음풍선사역 이다. 바람이 북으로 불기 시작하는 4월부터 8월까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민들레사역은 대체 로 북한과 인접한 휴전선 부근에서 이루어진다. 선교현장에 가지 않고도 북한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낼 수 있는 직접 사역이다.

 

 

왜 복음풍선 사역을 하는가?

 

1907년 평양대부흥이 일어났던 북한에는 해방 전에 3,166개의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공산화 이후 기독교탄압이 지속적으로 단행되면서 모두 지하로 숨어들어갔다. 은밀하게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성경이었다. 1983년 만주지역을 방문했던 이삭목사는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성도들로부터 북한으로 보낼 성경 100권만 갖다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것이 모퉁이돌선교회의 북한선교와 성경배달 사역의 시작이었다.
직접 가방에 성경을 가져가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북한으로 흐르는 바닷물을 이용해 작은 성경과 전도지를 북한으로 보내고, 1993년 봄부터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이 새겨진 주황색 비닐에 특수 제작된 복음풍선을 북한으로 보내오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익숙하지 않아 오후 3~4시쯤에 헬륨가스통을 싣고 가서 군부대나 지형 등을 살피고 안전한 장소를 찾아 놓은 후, 밤이 되면 산골짜기까지 50kg 되는 가스통을 둘이서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가서 새벽 3~4시까지 복음풍선을 보냈다.

 

처음부터 복음풍선 사역을 담당해 온 일꾼은
“초창기에 4명이 차에 가스통을 싣고 가다 검문에 걸렸습니다. 군부대에 끌려가서 2시간 조사를 받았는데, 성경이 인쇄된 풍선을 찢어 그 안에 혹 이상한 것이 적혀 있는지 꼼꼼하게 검사하고 성경뿐인 것을 확인하고는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람의 방향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위해 액체로 된 야광물질을 하얀 비닐에 넣고 띄우면 멀리서도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1994년부터 집중적으로 진행된 복음풍선사역은 한 곳에 머물러서 진행한 것이 아니라 헬륨가스통을 실은 승합차 안에서 불을 켜지 않은 채 풍선에 가스를 주입해 이동하면서 날려보내는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1994~1995년 바람이 북으로 부는 날이면 무조건 휴전선 부근으로 가서 복음풍선을 보내 한 해에 4만~4만 5천장을 북한으로 보냈다.
실제로 1994년 8월초 국민일보 기사에 임진강 바로 건너에 위치한 북한의 웅진반도에서 인민군 7,000여 명이 동원되어 풍선 수거작업을 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복음풍선사역은 해마다 바람이 북으로 부는 4월부터 8월에 휴전선부근에서 마가복음과 로마서가 새겨진 복음풍선에 헬륨가스를 넣어 북한으로 보내고 있다. 이 사역은 특별히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바람을 북으로 불게 하셔야만 가능한 사역이다. 그 어떤 사역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사역이 아닐 수 없다.

 

어린아이부터 세계 여러 나라 성도들까지 참여해 하나님을 만난다!

 

처음 복음풍선 사역을 시작할 때는 본회 사역자들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바람이 북으로 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가능한 사역이기 때문에 미리 공지할 수도 없었다. 사역현장에서 바람이 남쪽으로 불어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북으로 불게 하시는 기적을 여러 번 경험하였다. 그 후 북한을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참여해 동일한 은혜를 누리길 원하여 알렸다. 개인, 가정, 교회, 기관 등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복음풍선사역에 참여했다.
“사역에 3번 참여했는데 처음에는 ‘정말 이게 북한으로 갈까?’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현장에 가서 직접 기도할 때 한 영혼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볼 수 있다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풍선이 북으로 날아갈 때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평소 제가 기도한 만큼 복을 주시고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내와 기다림에 대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의 변화를 가져와 감사합니다.” 사역에 참여한 한 자매의 고백이다.

 

바람의 방향이 북으로 불어야만 할 수 있는 사역이기에 사역에 참여한 많은 분들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기도를 들어주시고, 또 바람의 방향도 바꿀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임을 체험하면서 믿음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간증한다.
자녀들과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해 은혜를 누리는 분들도 많다. 한 권사님은 “처음엔 신앙교육을 위해 초등학교 아이들 3명과 조카들을 데리고 참여하였습니다. 논두렁 같은 곳에서 기도하고 복음풍선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되었고, 북한을 위해 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커서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가 졸업할 때까지 계속 할 생각입니다.”라고 말씀해 주었다. 이렇게 자녀들과 함께 참여하는 경우,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은혜 가운데 신앙교육의 기회로 선용된다.
이제는 개인적인 참여에서 그치지 않고 멀리 부산, 창원, 전주, 대구, 대전, 천안 등에 소재한 기관과 교회의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참여하고 있다. 안성교회 여름성경학교에서 본회 일꾼이 북한선교에 대해 전하고, 아이들 64명이 대형버스 2대를 타고 사역에 참여했다. 사역을 시작하기 전 “여러분 휴대폰을 켜지 말고, 떠들면 안됩니다”라고 주의사항을 전한 후 시작했다. 풍선을 받아 든 아이들은 “야~ 기도하고 날려, 야~ 기도하고 해!”라고 서로 속삭이며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도하며 복음풍선을 보냈다. 특히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선교현장에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복음풍선사역이야말로 어린이들이 직접 선교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또한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브라질, 호주, 뉴질랜드, 일본, 중국, 홍콩 등 10~15개국에서 사역에 참여했다. 외국에서 온 분들의 사역을 인도했던 한 일꾼은 “벼가 많이 자란 7월쯤으로 기억됩니다. 미국인들 40여 명을 태우고 사역할 장소로 가면서, 깜깜해도 불을 켜지 말고, 소리도 내지 말고, 차가 지나가면 모두 숨어야 된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논두렁으로 걸어가던 중 뒤에서 오는 차가 지나가도록 비켜선 후에 뒤를 돌아보니 40여 명이 모두 논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논물에 빠져 옷이 젖고, 진흙탕 물이 튀었음에도 논두렁으로 걸어 나와 땅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라며 그 때의 뭉클했던 순간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하였다.

 

몇 년 전, 캐나다에서 10여 명의 청년들이 본회 복음풍선사역에 참여했다. 그 청년들과 사역할 장소에 갔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금방 멈출 빗줄기가 아니었다. 10분 정도 기도하는데 비가 더 세차게 내려 할 수 없이 차 안으로 들어가 기도했다. 그렇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돌아와야 할 상황이었다. 캐나다에서 왔기에 청년들과 다시 마음을 모아 비가 그치게 해달라고 전심으로 기도했다. 그렇게 10분 정도 더 기도했을 즈음 부슬비가 내리더니 비가 그쳤다. 헬륨가스를 풍선에 넣어 날려보니 정확하게 북쪽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30분 정도 지나니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또다시 기도하니 비가 그쳤고 30분 사역을 하면 비가 내리고 다시 10분 정도 기도하기를 5시간 정도 반복했다. 그리고 사역을 위해 준비해간 복음풍선을 모두 북으로 보냈다. 사역을 끝마쳤을 때 한 청년이 “우리는 북한 성도들에게 말씀이 필요해서 여기 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날씨를 주관하고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알도록 우리를 이곳으로 부르셨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이 청년들은 다음 해도 복음풍선사역에 참여했다.
청년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확장될 수 있는 사역의 현장이 바로 복음풍선사역에 있다. 멀리 외국에서도 와서 할 수 있는 이 사역은 우리가 핑계 댈 수 없는, 해야만 하는 사역이 아닐까?
2011년~2017년까지 총 3,260명이 복음풍선 사역에 참여했다. 이렇게 보내진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북한에 가는 걸까?

 

 

북한에서 받아본 사람들이 있다.

 

1994년, 함경도에 사는 어린아이가 학교를 가다 나무 울타리에 걸려 있는 주황색 물체를 보았다. 눈에 확 띄는 주황색을 보고 호기심에 다가가 그것을 주워 보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기에 집으로 가져가 엄마에게 드렸다. 엄마는 아이에게 받아 든 풍선을 시어머니에게 가져갔다. 그것을 본 할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잊혀진 줄 알았는데, 누군가 아직까지 우리를 기억하고 있구나. 우리 국군이 오면 이걸 들고 나가 환영하자.”라고 했다. 이 내용은 북한을 방문했던 현지 일꾼에게 듣게 되었다. 그리고 장사를 위해 황해도를 자주 방문했던 한 조선족 일꾼은 북한에 갔을 때 밤에 하늘에서 성경이 인쇄된 풍선이 떨어지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일꾼에게 그것이 어떻게 생겼더냐고 물었다. 그는 “주황색이고 비닐로 되어 있었습니다.” 라고 했다.

 

10여 년 전에 북한을 방문했던 박태희목사가 직접 보고 들었던 소식을 전해준 내용이다.
“목사 선생, 이럴 수 있습니까?”
북한의 한 당국자가 손에 주황색 비닐을 가득 들고 와서 목회자들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게 남조선에서 보낸 겁니다. 엄연히 휴전협정을 위반한 적대행위입니다.”라고 언성을 높이는 그의 손에 들려진 주황색 비닐은 바람이 부는 날 산에 가면 많이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그 풍선에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박태희목사는 그 내용을 설교 중에 전하였다. 그 자리에는 본회 일꾼이 있었고, 그 때 증언한 음성파일이 본회에 준비되어 원하는 분들에게 나눠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17년 8월 탈북형제가 본회를 방문했다가 복음풍선을 보고는 “어, 이게 왜 여기에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우리가 북한에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했더니 “아 그래요, 2015년 여름에 우리 오마니가 이거 직접 주웠슴다.”라고 했다. 고향이 청진이라고 하는 형제가 “저는 이거 중국에서 보내는 건줄 알았슴다. 그런데 여기서 보낸 겁니까?”라며 놀라워했다.
이렇게 우리가 보내고 있는 복음풍선이 가까이는 웅진 반도와 개성에 떨어지고, 멀리는 함경도 청진까지도 날아가고 있음을 하나님께서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시켜 주고 계신다. 그러하기에 이 사역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앞문이 닫혀 있다!

 

최근 들어 선교현장 특별히 북한선교를 하는 지역과 일꾼들에게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이렇듯 극도로 위험한 선교현장의 환경이 끝나고 활발한 사역이 가능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국내에서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북한에 보낼 때, 하나님께서 그 땅을 진동케 함으로 앞문과 뒷문이 활짝 열려 거대한 복음의 물결이 북한에 밀려들어가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무엇보다 휴전선을 따라 진행되는 복음풍선 사역은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이로부터 연로하신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언어가 달라도, 가난하거나 부한 자, 약한 자와 강한 자 누구나 북한을 위해 기도하며 선교사역에 참여하기 원하면 누구라도 가능한 사역이다. 즉 선교현장에 가지 않고도 국내에서 직접 북한선교를 할 수 있는 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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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소식 2018.3. 특집 1] 오늘도 북한에 지하교회가 개척되고 있다!

 

지난 1월말 본회 선교사들의 모임이 곤지암에 위치한 소망수양관에서 진행되었다. 복음이 제한된 북한과 중국, 중국내 소수민족, 아랍, 이스라엘과 기타 지역에서 사역하는 협력선교사들까지 지난 한 해 동안 선교현장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며 감사와 찬양을 주께 올려드렸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성경배달, 신학교배달, 선교사배달, 교회개척, 구제사역 가운데 친히 행하신 놀라운 역사를 함께 나눌 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선교사와 사역의 보호를 위해 구체적으로 나눌 수 없지만 그 중에 핍박의 강도가 심해지고 있음에도 북한에 지하교회가 세워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내용만이라도 우리 회원들과 함께 기도하기 원하여 3월 카타콤소식에 정리하였다.

 

 

북한지하교회의 환경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다!

 

북한이 올해도 어김없이 ‘전 세계 최악의 기독교 박해국가’로 선정됐다. 오픈도어선교회의 ‘2018년 기독교 박해 순위 50개국’ 발표 결과에 따르면 북한은 17년째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2~10위까지의 순위는 여러 국가들이 들락날락하지만, 1위만은 변화가 없다. 이번 선교사모임에서 북한선교를 담당하고 있는 선교사들 또한 “북한선교의 환경이 날로 어려워지고 있다”라고 전하였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지속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이뤄지면서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북한지도부는 죽음을 불사하는 신앙인들을 보며 독재체제를 유지하는데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이 기독교임을 알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독교인들의 색출에 주력해 왔다.

 

1995년을 전후해 식량을 구하러 나왔다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주민들이 북한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발각되는 사례가 빈번해지면서 북한당국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기독교인 색출은 물론이고, 북한과 인접한 지역에서 북한선교를 감당해 온 조선족교회 사역자들과 선교사들에게 접근해 납치하고 살해하는 등의 악행을 일삼아 왔다. 특별히 2015년 한충렬목사가 북한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된 이후 북한과 인접한 지역에서의 중국당국의 경비가 강화되고, 선교사들에 대한 단속이 점점 심화되면서 북한선교는 더욱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정부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추적하고 압박할 뿐만 아니라 추방까지 계속하고 있어, 북한선교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렇다면 이러한 환경에서 북한지하교회 성도는 얼마나 될까?

 

 

북한지하교회 성도는 얼마나 될까?

 

지난 해 9월 곤지암 소망수양관에서 개최된 통일을 준비하는 ‘글로벌 국제전략회의’에 초청되었던 정부기관의 한 관계자로부터 “북한 당국에서 3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잡혔다”고 듣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형태로든 남북한의 군사적인 충돌이 발생할 시에 사상자를 30만 명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는 데 하나님께서 필자를 향해 물으시는 말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가 한반도에서 일어날 군사적인 충돌이나 전쟁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으면 안 된다고 그토록 간절히 막아서서 내게 기도하면서, 정작 지금도 북한 땅에서 믿음을 지키는 30만 명 이상의 내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한국교회와 너희의 무지함과 무관심에 처절하게 탄식하는 나의 소리를 듣지도 못하니 내 마음이 녹아내린다.”고 하셨다. 이 말씀에 아무 말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이번 선교사 회의에서 참여한 A선교사에게 “북한지하교회 성도수를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물었다.
“6~7년 전에 북한지하교회 성도수가 20만 명이라고 할 때 모두 들 ‘뻥’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2~3만 명이라고 했기 때문에 말하기가 무서웠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에서는 언론과 괴리가 있으면 그 진실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때 당시 함경남북도만 해도 20만 명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P선교사에게 북한성도 수를 얼마로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필자에게 “고난의 행군 이후 식량을 구하러 중국으로 나왔다가 북한으로 돌아간 수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되물었다. “북한에서는 해방전부터 믿음을 지켜온 그루터기 성도들이 있고, 고난의 행군 이후 식량난으로 탈북한 사람들이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80만 명으로 봅니다. 이 중에 중국에 거주하거나 제3국 혹은 한국으로 온 사람들의 수까지 포함해서 20~30만 명을 뺀 나머지 30만~50만 명이 북한으로 돌아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중에 대부분이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탈북한 사람들을 중국 일반백성들이 도울 수 없어 대부분 ‘교회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탈북자들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이들을 중국교회와 선교사들이 함께 협력해 도우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도움을 받고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로부터 ‘중국에 가서 십자가가 있는 교회를 찾아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말들을 듣고 북한에서 무작정 십자가를 보고 찾아온 탈북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들었다고 봅니다. 이들이 예수를 믿고 북한에 돌아가 한 명에게 복음을 전했을 경우, 20만 명이 전했다면 40만 명이고, 30만 명이 전하면 60만 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충분히 추정할 수 있는 숫자입니다.” 라고 했다.
복음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북한에서 지하교회성도 수를 정확히 제시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현장에서 오랜 시간 북한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또 그들을 훈련시켜 사역자로 파송한 선교사들이 제안하는 북한지하교회 성도 수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닌 충분히 유추 가능한 근거에서 제시되는 것이기에 놀랍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지하교회 성도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북한지하교회가 훈련된 성도들을 통해 개척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전도한 사람이 교회에 나와 등록하는 순간 교인이라고 하고, 간혹 어떤 교회는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해야만 교인이라고 한다. 보편적으로 예배당에 나와 예배 드리는 사람을 우리는 성도라고 한다.

 

A선교사에게 선교현장에서 북한지하교회 성도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고 물었다.
“저는 믿음을 고백하면 성도라고 합니다. 때로 식량을 구하러 왔다가 선교사를 만나서 복음을 듣고 영접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식량을 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믿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을 우리가 성도가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제가 북한지하교회 성도가 50만 명이라 했던 수에는 해방 전부터 믿음을 지켜 온 그루터기 지하교회와 1995년 전후해 식량을 구하러 왔다가 복음을 듣고 돌아간 성도들에 의해 세워진 성도와 지도자 등이 포함됩니다. 물론 믿음을 고백했지만 북한에 가서 생활하느라 믿음을 잃어버린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며 구제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을 가르치고 양육할 수 있는 사역자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복음을 전해 예수를 영접한 성도들을 단기간 훈련시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식량과 돈이 필요해서 나온 사람들에게 장기간 말씀으로 훈련시키는 사역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에 인내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모퉁이돌선교회에서는 2년 이상 집중적인 말씀훈련을 시켜 목사 안수 후 북한선교사로 OO명을 파송하였다. 이 외에도 단기간 훈련을 받고 돌아가 전도하고 지하교회를 세워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다. 위에서 언급된 대로 북한지하교회 성도들은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훈련된 성도들을 통해 지난 한 해만 26개, 2017년까지 본회를 통해 총 1,769개의 지하교회가 세워지도록 역사하셨다.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라고 증언한다. 세계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가장 극심한 북한에서 믿음을 지키며 복음을 전하는 제2, 제3…의 수많은 바울과 같은 성도들에 의해 오늘도 하나님의 복음은 흥왕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계속해서 개척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과 연합한 북한지하성도들이 더 많은 교회를 세워가도록 한국교회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복음통일이 속히 이루어지도록 준비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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