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칼럼] 통일의 날까지 북한에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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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이민을 떠났던 저는 1979년부터 교회사역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1982년 목사 안수를 받고 난 1년 뒤 중국 정탐여행을 하고 돌아와 1985년부터 모퉁이돌선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빈손으로 이민을 떠나 18년이 지나니 언어와 문화 그리고 재정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괴롭히는 그 무엇이 있었는데 바로 어머니와의 약속이었습니다.
미국에 이민을 간 것은 순전히 미국 시민권을 얻은 후 북한으로 가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어머님과의 약속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의 초빙은 계속 되었습니다. 적게는 150명 정도의 교회부터 많게는 1,200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청빙이 왔지만 저에게는 <북한>이라는 무서운 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북한사역에 대한 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이 모금하기 위해 미국으로 오는데 저는 아무도 아는 이 없는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985년 한국에서 모퉁이돌선교회의 시작은 사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북한이 공산화 되고 6·25 전쟁 시에 월남하신 어르신들의 부정적인 생각이 교회 안에 팽배해 있었기에 공산권 선교는 생각하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실제로 한국 국적을 가지고는 여행을 하는데 어려움이 따르기도 했습니다. 그런 때에 북한선교를 하자고 나섰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을까요?

 

그리고 사역을 위한 헌금은 주인이신 하나님이 공급하실 것을 믿고, 이 일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을 찾는 것이 급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역을 시작할 때 아내와 9살, 7살 된 딸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2,300만 명의 북한 영혼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으로 가족들의 경제적인 문제를 책임져야 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제게 맡겨진 북한이라는 땅을 품어야 할 꿈과 책임이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후로 제가 의도한 것이 아닌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사역자들을 하나님이 모아 주셨고, 필요한 재정도 공급해 주셨습니다. 현지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나 훈련하는 일 그리고 선교에 경험이 많은 분들을 만나게 하시는 것도 모두 하나님이 이끌어 가셨을 뿐입니다.

 

솔직히 선교를 시작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저는 당연한 길이라 여겼습니다. 아내나 딸들이 그 일로 인해 불평 해 본 일이 없었기에 저는 더 힘들었습니다. 차라리 불평을 했었다면 싸우기라도 하고 고집을 부렸을 텐데 가족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지금도 그 일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사실은 아내가 사역을 하며 묵묵히 따라주기에 오늘까지 사역을 중단하지 않고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희에게 감당할 만한 건강도 주시고 일꾼들도 주시며 모든 일을 채워 가고 계십니다.

 

저는 북한을 위해 기도할 사람들을 찾는 한편 중국의 만주 땅으로 들어가서 조선족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에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엿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회가 주어져 그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의 중국사역을 한 경험이 도움이 됐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은 다른 곳이었습니다. 저는 계속해 머무는 사역자가 아닌 공급원이었기에 그들의 필요를 찾아내야 했습니다.
우선 급한 대로 성도들의 필요를 알아낸 것이 그들에게 필요한 성경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성경을 공급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지면 되었기에, 융판에 그림을 붙이는 성경재료와 만화, 쪽 복음 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힘써 왔습니다. 만나서 대화를 하고, 식사를 하고, 사업이나 구제도 모두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현지에서 만난 일꾼들의 필요를 공급하면서 그들을 북한 땅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왜 우리는 그들이 살아 있음을 몰랐을까요?
우리는 방송으로, 전단지로, 개인 편지로, 팩스로, 소포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만 전해질 수 있다면 그 방법을 찾아내 북한에 복음전하는 일을 했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비밀스런 일들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북한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들어 더욱 호전적이고 공격적으로 대남공격의 수위를 높이는 그들의 행동거지가 바로 북한 붕괴를 알리고 있는 것은 않을까요?
저는 지난 3월 28일 팀수양관에서 가졌던 목회자모임에서 지난 1년 동안 복음통일을 준비해 오신 교회의 사례발표를 들으며 이 민족가운데 주님이 행하시는 통일준비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 감을 보며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끝내 이루실 통일의 날까지 북한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무익한 종이삭목사님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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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칼럼] 교회마저 마음 둘 곳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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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찾아갈 곳도 없고, 찾아가 만날 친척도 없고, 특별히 명절이나 특별한 날이 될 때 하늘을 바라보며 먼 옛날의 고향 친구들과 가족들을 기억하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저는 오래 전에 이민을 떠났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 땅에도 수십 년 자라나고 살아온 그 땅을 송두리째 포기하고 살아야 하기에 떠나오기는 했지만 왠지 서글픈 마음과 그리움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제3국으로, 남한으로 온 탈북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이런 저런 말을 들으며 자신들을 향한 손가락질이라 생각되어 숨죽여 울기도 합니다. 무엇을 볼 때면 부럽고, 사람들이 무리에 끼어주지 않아 속상하고, 차별당하는 서러움에 아파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를 만나기는 했어도 친구가 필요하고 가족의 위로가 있어야 하는 인간이기에 오늘도 먼 하늘 바라보며 공연히 투정부려 봅니다.
따뜻하고 맛있는 밥 한 공기를 앞에 두고, 북한에 두고 온 식구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어쩌다
외식을 하며 푸짐한 고기라도 먹을라 치면 뒤돌아 앉거나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훔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와 앉습니다. 옷가게를 지나며 예쁜 옷이 눈에 들어오면 부모와 자식들이 생각나 발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보고, 얼굴과 손에 바를 화장품이라도 볼 때면 보내주고 싶으나 보낼 길 없어 땅바닥만 내려다 봅니다.
겉으로는 다 같아 보이는 모습이지만 마음은 멍들어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이들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뼛속까지 스며든 이 아픔과 고통을 교회라도 알아주면 좋을 듯 한데 교회마저도 마음 두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 사랑으로만 치유가 가능한 탈북민들이 있음을 아는가 묻고 싶어집니다. 애써 그들을 모른 체 외면하고 살아온 저 스스로에게 저들을 향한 눈물이 있는가를 물어봅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킨 북한성도들에게 통일된 한국의 새 여권을 만들어주어 예수님이 태어나고 살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셨던 이스라엘 땅을 안내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을 보내 준 땅을 밟아보게 하고 싶어집니다.
그리하여 4월에 탈북민들 가운데 몇 사람에게 이스라엘을 보게 하고자 동행합니다.
그들로 예수의 사랑을 흠뻑 누리게 하여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통일의 때에 복음의 일꾼들로 자라도록 준비되게 하고 싶습니다.
평양에서 예루살렘까지…

무익한종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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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칼럼] 눈물로 기도의 잔을 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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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나라와 민족을 구해 달라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들이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그러기를 30년이 지나도록 울었습니다. 요즈음도 울지만 우는 이유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들을 용서하신 그 넓은 사랑에 감격해서 웁니다.

성경을 읽다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 그 은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더 악하고 거짓되고 불의한 저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표현할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표현밖에 다른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랑에 감격해 울다가 하나님을 모른 체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다시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부르심에 울기 시작했고 선교지를 위해 울어야 했습니다. 사역을 하다 보니 철이 들어가는 것일까요?

제가 받은 사랑이 너무 엄청나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어 그 사랑에 감격해 웁니다.

돌부리를 차고 지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울고,

하나님이 제게 베푸신 모든 환경을 통해 일하시는 자상함에 울고,

주어진 사역이 너무 귀한 것에 놀라서 울고,

일할 기회와 지혜를 주심에 감격해서 울고,

좋은 일꾼들과 함께하는 사역과 가정을 주신 사랑에 울고,

만날 사람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배려에 울고,

피할 사람을 피하게 하신 그의 보호에 울고,

막으시는 일이 저를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하셔서 울고,

제게 믿음의 어머니와 함께하는 아내와 딸들을 주심에 감사해 울고,

앞서가지 않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울고,

나같이 못난 사람을 위해서 아들을 기꺼이 내 놓으시고 십자가에 피 흘리게 하신 그 사랑 때문에 울고는 합니다.

 

그 추웠던 만주 벌판에서 들렸던 음성!

“나는 그 땅을 포기한 적이 없다”

“그 땅에 내 백성들이 살아 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뭐라고 해야 할까?

북한 땅에 당신의 백성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

그 공산당들의 무리 가운데 믿음을 지켜 가도록 보호하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이토록 진하게 제게 와 닿는데 어찌 울지 않으랴!

그 사랑을 맛 본 여인은 열다섯 시간이나 눈 덮인 산을 넘고 또 넘어서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여 울다가 돌아가는 여인의 믿음과 눈물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랑 때문에 울고, 용서 때문에 울고…

세우심에 감사해 울고, 보내심에 감격해 울고…

공급하심에 울고, 기회 주심에 감격해서 울고…

저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사랑하심에 웁니다.

오늘도 “하나님 저들을 버리지 말아주세요!” 울며 기도하다 새우잠을 잡니다.

이 겨울에도 온갖 핍박과 추위를 견디며 믿음을 지키는 이들을 생각하며,

선교지 사역자들의 아픔이 곧 제 아픔이 되어 웁니다.

“우리 떨어져서 살면 안돼?”라고 물어야 했던 선교사의 아픔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울고,

오늘도 바람 앞에 높인 이 나라와 민족을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올려드리며 기도의 눈물을 흘립니다.

 

이제 저 혼자 기도하며 흘린 눈물을 함께 흘리며 통일의 문을 열어갈 많은 기도용사들이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무익한 종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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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칼럼] 제 귀에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통일을 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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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죽어가는 자식을 품에 안고 울어본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어머니를 땅에 묻고 울며 돌아서 본 일이 있었습니까?

망해 버린 동족을 위해 통곡하며 울어본 일이 몇 번이었습니까?

저는 지난 30년을 그렇게 울었지만 여전히 버려진 동족을 이끌어 주님 앞에 세우지 못해 울기를 얼마나 했었는지 모릅니다. 기도는 했다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 땅에 남아 있어야 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녕 이것뿐이냐고 통곡하는 제 마음을 하나님은 아실까요?

 

저는 예루살렘에 서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진 찍고 둘러보는 동안 저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슬픔을 억제할 수 없어 그냥 울어야 했습니다. 올해로 네 번째였던 예루살렘에서의 설교를 마치고 허전해진 가슴을 메울 길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통일이 되지 않아 북한성도를 예루살렘에 데려와 성지순례를 함께 할 수 없음에 울었습니다. 1952년 어머니와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10년 후, 어머니는 제게 다시 “북한에 꼭 가야 해! 거기서 죽어 묻히던지 아니면 끌고 나와 예루살렘으로 가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예, 어머니”하고 대답했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슬퍼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순례 길에 저는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며 눈물만 흘릴 뿐이었습니다.

 

서울에서 함께 왔던 이들이 떠나고 난 뒤 저는 안내자를 따라 한 언덕을 보기 위해 이동 중이었습니다.

분명한 음성이 제 귀에 들려왔습니다.

“통일을 준비하라!”

순간 저는 아무도 없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앞에는 선교사와 동행인이 앉아 있었고, 옆 좌석에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시계를 보았습니다.

정확히 이스라엘 시간으로 10월 4일 오후 3시 35분에서 45분 사이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통일을 준비하라구요? 어떻게요? 무엇으로요?”

하나님께 계속 질문하는 동안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에벤에셀 언덕이었습니다.

에벤에셀!

사무엘상 7장 12절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했던 바로 그 자리에 오게 하시고 제 귀에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왜 그 자리였을까요?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는 말씀에서 ‘여기까지’라는 단어를 들려주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그 곳은 순례자들이 찾지 않는 곳입니다.

안내판도 없고 몇 개의 히브리어로 된 표시만 있을 뿐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통일을 준비하라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했습니다.

왜 그곳이어야 했을까요?

저는 북한성도들을 이끌고 그곳에 가기를 원합니다.

오늘이라도 통일이 되면 저는 북한성도들로 눈을 떠 이스라엘 땅을 보게 해 주어야 합니다.

북한의 한 노인은 제게 물었습니다.

“요즈음 이스라엘이 어떻게 돌아가느냐?”고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 노인은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신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정말 이렇게 힘들지 않겠지?”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날을 위해 함께 기도할 분들을 찾습니다.

주님 오실 날을 위해 북한 성도들에게 이스라엘을 순례케 할 그 날을 위해…

에벤에셀의 언덕을 함께 걸어올라 갈 그 날을 위해…

함께 기도하지 않으시렵니까?

 

무익한 종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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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칼럼] 엄마, 저 사람들을 언제까지 도와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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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만 두 살이던 1947년 황해도 고향을 떠나 서울의 냉천동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 부친께서 삽교로 파송 받아 함께 떠난 우리 가족은 부활절 예배 후 6·25 전쟁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고향을 떠날 때는 짐 보따리에 얼마간의 돈을 넣어 가지고 떠났지만 소련군이 관리하는 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빼앗겼으며 그 밤에 남한으로 넘어와야 했습니다. 그 날부터 저희의 삶은 거지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니는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어린 저는 집에 남겨져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합니다.

 

목사 가정이 피난길에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제주도 성산포로 피난 갔을 당시 5~6세였던 제 모습은 거지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먹을 것을 공급받게 도우셨습니다. 그 때 누군가 저를 위해 쌀과 보리밥, 강냉이 죽을 공급했습니다. 집은 수용소로 사용되던 학교였으며 옷은 걸치는 것뿐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 삽교로 돌아온 우리 가족은 교회를 논산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논산에서 목회를 하시던 외할아버지는 연약한 어머니를 안쓰럽게 여겨 돌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당시 한국 땅은 거지들과 문둥병자 그리고 상이군인으로 넘쳐났습니다.

아버님이 강경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 누군가 자전거를 보내 주었고, 아이들에게 젖을 짜서 먹이라며 양을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옷들을 보내오기도 했는데 가끔 주머니 속에 장난감이 들어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마칠 때 아버님은 다시 서울로 파송되셨는데, 미국인 선교사들이 저희 집을 드나들었습니다. 그 분들은 올 때마다 밀가루며 쌀 등을 차에 싣고 왔고, 저희는 그것을 교회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모두들 가난했기에 교회목사 가정이었던 우리는 그것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도 어렵고 힘들었지만 찾아오는 거지들을 먹여야 했습니다. 심지어 어머니는 거지들을 먹일 쌀을 구하려고 피를 팔기도 했습니다. 교회성도들 중에는 볏 집에 싼 계란 두 줄을 사서 한 줄은 목사 사택인 저의 집에 놓고 가기도 했습니다. 거지들을 먹이라고 닭을 사서 사택에 놓고 가고, 어느 때는 쌀가마니가 문 앞에 놓여 있었으며, 당시 국회 부의장이었던 황성수 박사님은 연말마다 쌀과 사과상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는 8월과 12월이 되면 저희를 산에 보내 기도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중에 잊혀지지 않는 말씀이 “모였던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사…”라던 오병이어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는 그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너도 주님처럼 민망히 여겨 저들을 먹이고 입힐 때가 올게다!”라고 하셨습니다. 여전히 가난했고 쌀독을 박박 긁어야 하는 일이 제 몫이었습니다. 거지들에게 정성스레 음식을 준비해 나누었지만 정작 저희는 늘 배가 고팠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들이 먼저다”라는 한 마디 말씀을 하시고는 그들부터 먹여 보냈습니다.

 

황해도 장연에서 부농의 지주 딸이었던 어머니는 가난한 교회목사의 아내였지만 배고파 찾아오는 이들을 먹이고 나눠줘야 했습니다. 그 어머님이 제게 미국 시민권이 있으면 북한 고향에 가서 전도할 수 있다며 다독이셨습니다. 그렇게 배고파 찾아오는 이들을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먹이라 하시던 어머님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어머니께서 제게 남겨준 것은 바로 예수 중심의 삶이었고, 그 예수의 삶을 배워 나누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남겨진 저희 가족을 미국에 갈 수 있게 역사하셨습니다. 이민 생활을 시작한 제게는 돌보아야 할 동생들이 있었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워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신학을 하고 목사로서 그리고 공산권 선교를 시작한 저를 돌봐주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선교기관들도 있었고 훌륭한 영적 선배님들이 있었습니다.

 

1983년 저는 순전히 선교정탐여행으로 중국에 들어갔습니다. 제 눈에 보인 중국은 거지 나라였습니다. 홍콩의 뒷골목부터 시작해서 동북 삼성의 도시와 시골 곳곳마다 거지와 배급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을 도울 능력이 없었습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이 그 곳 성도들에게 한 권의 성경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제게 그들을 위해 써달라며 선교헌금을 맡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요청하는 그들의 필요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몇 십 년 동안 성경 없이 말씀을 듣지 못하고 혼자서 울며 믿음을 지켜 온 성도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성경배달이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부동산을 팔아 성경을 구입해 배달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공산권 선교에 부정적이었고, 여행할 수 없었던 시기였기에 저는 가방 한 개 두 개 조금씩 더 배달한 것이 모퉁이돌선교회의 사역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경학교로, 신학교로, 목회자 양성으로, 교회개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경을 배달하다 잡히고 고난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렸습니다. 구제는 다른 분들이 조금씩이라도 하는 것을 보았기에 성경배달에만 집중한 것입니다.

 

2002년 1월 1일 새벽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덜덜 떨며 제 옷을 달라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날 제 가슴은 감당할 수 없이 아팠으며 이제는 이것도 좀 감당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배달은 지속되었고, 방송선교도 끊임없이 감당할 것이지만 구제도 확대시켜야 했습니다. 저와 모퉁이돌이 해야 할 일임을 알게 하셨다고 믿었습니다.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저희는 정말 어려운 생활을 했습니다.

빈손으로 시장에 가면 아주머니들이 이것 저것을 집어주기도 하시고, 또 다음에 돈을 달라며 외상으로 쌀을 비롯한 먹거리를 주시고는 하셨습니다. 저는 그 손길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손길이 있었기에 지금 제가 살아 있습니다. 그런 손길들이 있었기에 미국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 손길들이 있었기에 선교를 시작하게 됐고, 그 손길이 있었기에 성경을 배달했습니다. 그런 손길이 있었기에 저는 북한에 교회를 세우고 지도자를 먹이고 입힐 수 있었습니다.

그런 손길이 있었기에 의약품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선교지로 떠나는 제게 50만 원의 현금을 쥐어주는 이가 있었습니다. 제가 50만 원이 정말 필요했는데,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공항에서 그 50만 원을 제 손에 쥐어주신 것입니다. 그 누군가의 손길이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 북녘 땅에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35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어갔으며, 오늘도 북한 땅에서 영양실조로 굶어가며 도둑질을 하며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누군가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 어머니에게 “엄마! 저 사람들은 여전히 거지야? 언제까지 우리가 도와주어야 해?”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들이 여전히 거지로 남아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의 일이고, 그들을 민망히 여겨서 돌아보는 일이 우리 일이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북녘 땅에 또 겨울이 다가오는데 저와 여러분이 장갑 하나, 털모자 하나, 양말 하나,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눌 누군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무익한 종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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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칼럼]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살아 역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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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없어 울부짖는 성도들을 보셨습니까?

성경을 빼앗겨 불태워진 후에 빈 손으로 주님의 이름만을 부르던 성도들의 찢어진 마음을 아십니까?

 

김칫독에 숨겨 놓았다 꺼내보니 김치 국물에 젖어 너덜너덜해진 성경을 들여다 보며 울고 있는 어머니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제가 가졌던 성경을 보며 ‘그것 놓구 가라요!’ 라고 하는데 못들은 체 할 수 없어 주고 난 후 두 주간을 여행하고 돌아와 허겁지겁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제가 성경을 배달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의 만주 땅이었습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였고, 소련의 시베리아 땅이었고, 북한의 이곳 저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베트남, 미얀마, 카작스탄, 이란에서도 성경을 요청해 배달했습니다.

 

그렇게 가져간 성경이 메마른 영혼을 다시 살리는 것을 보는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자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있어 신학교를 시작했습니다.

그 말씀을 배운 자들은 스스로 평양, 원산, 함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 배워야 하겠다며 다시 말씀을 먹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두루마리를 먹어야 하는 성경의 이야기가 오늘의 북한성도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지금도 성경을 배달합니다.

성경을 배달하니 성경학교가 시작되었고, 말씀을 배우고 돌아가서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지하 교회입니다. 그들은 부족하다며 다시 와서 더 배우고 돌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북한에 1,600개 이상의 지하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로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을 살립니다. 메말랐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반석 위에 주의 교회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무익한 종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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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칼럼] 카타콤소식이 300호를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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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돌선교회가 “카타콤 소식”을 만들어서 나누기 시작한 후 이번 8월호로 300호를 맞았습니다.

 

처음에 사역을 하면서 선교회 내부에서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귀한 간증들이 많아 중국 조선족들과 북한 성도들의 이야기를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성도들도 함께 알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소식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벌써 300개월이 되었습니다. 수고한 분들이 있어 여기까지 온 것이지만 아직도 솔직하게 쏟아내지 못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통일이 되어 북한에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 후에나 공개 가능한 숨겨진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이름을 밝힐 수 없고, 사는 지역이나 장소 혹은 직분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혹 세상을 떠나시더라도 주변의 가족들이 어려움을 당할까 봐 조용히 때를 기다리면서 소식지를 만들어 왔습니다. 소식지를 읽으면서 그 뒤에 숨겨져 있을 이야기들을 찾아내어 조용히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어떤 분은 소식지를 읽으면서 기도하고 어떤 분은 통곡을 하십니다.

어떤 분은 너무 모르고 산 것이 죄송하다며 성경을 보내기 위한 헌금을 하십니다.

어떤 분은 남북연합예배에 참석하셔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돌아가십니다.

어떤 분은 방송을 위해 기자재를 헌금해 주시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평양성경대학을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한 목사님은 주문도에 가셔서 공사하실 일을 보셨다며 전화해 주셨습니다.

한 분은 길바닥에 버려진 카타콤 소식지를 주워 읽고 감동하여 선교사로 나가셨습니다.

감옥에서 카타콤 소식지를 읽고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온 죄수도 있었습니다.

인쇄하는 비용이 많이 들겠다며 헌금하시는 분도 있고, 자원사역자로 일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저 또한 카타콤소식의 글을 읽다가 흐느껴 우는 경험을 자주합니다.

중국의 한 지도자가 “당신은 왔다 가고 없어지지만 당신이 가져온 이 성경은 남겨집니다.”라고 한 말이 제가 성경을 배달하게 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전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카타콤 소식지를 읽고 연락을 해 오십니다.

보내고 싶은 곳이 있으신가요? 기꺼이 보내드리겠습니다.

함께 기도할 분들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수고와 기도,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300호가 출간되기까지 임마누엘의 하나님 되어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

할렐루야!

 

 

 

무익한 종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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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칼럼] 여러분들의 헌신이 열매가 되어 북한선교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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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성도들이 북한에 성경 보내는 일에 써달라며 헌금을 보내온 일이 믿어지십니까?

1970년대 중국은 영적으로 메말라 있던 기간이었습니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 사망 전까지 그가 주도한 문화혁명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많은 문제들과 후유증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문화혁명은 1976년 말에 끝이 났습니다.

그 기간에도 해외의 단파, 중파방송을 통해 중국전역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홍콩을 통해서 배달된 성경들이 광동성을 중심으로 중국의 남쪽 산악지대에서 당나귀에 실려 곳곳으로 배달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외국인들의 여행이 가능해지면서 그들을 통한 성경배달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성도들은 가뭄에 단비를 기다리듯 성경 한 권을 원하였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쪽 복음 한 권씩, 심지어 한 페이지의 성경을 쥐고 암송하던 시국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증과 아픔을 경험했던 중국성도들이 아니고서는 성경을 받았던 그 감격을 알 길이 없을 것입니다.

 

1983년에 중국동북지역의 오지를 방문하며 그들의 갈급함을 알게 된 저는 1985년부터 성경을 본격적으로 배달했고, 그것이 성경을 기다리던 중국성도들에게는 한줄기 샘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중국성도들에게 배달된 성경이 어디로부터, 누구에게서, 그리고 누가 배달하는지를 말해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보안 때문이었고, 또 한편으로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의 자랑에 빠지게 될까 두려워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잡혀 끌려가 매 맞고, 투옥되는 경험을 하면서 중국성도들은 이 성경을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일까? 아니 더 구할 수는 없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배달을 감당하고 있던 선교사가 현장에서 잡혀 추방당했습니다. 그 선교사는 끝내 성경을 공급한 모퉁이돌선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 후 얼마 동안 성경배달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추방당한 선교사는 본 선교회에 중국의 특정지역에 성경을 배달해 줄 것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때부터 성경을 요청하는 지역과 양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저희는 이것을 감당하기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권에서 수만 권으로, 수만 권에서 수십만 권으로 요청받은 성경을 하루하루 감당해 온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 성경을 받았던 성도들이 30년이 지난 오늘 교회에 십자가를 세우고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고, 주석성경도 공급받고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위한 자료나 기독서적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자기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성경을 가져다 준 사람들이 누구였을까? 궁금해 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여전히 성경을 배달하고 있고, 중국어로 된 서적을 구입해 보급하고 심지어는 책방을 통해 보급하고 있으며, 또 신학교와 교회들이 개척되고 운영되면서 적어도 1년에 한 두 번씩의 중국 방문을 통해, 그리고 그들을 서울과 제주도로 초청해 성경에 기초한 신학과 선교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던가요? 중국성도들이 깨달아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손에 성경을 전해주기 위해 공안의 눈을 피해 공항을 통과하고, 눈 오는 그 산골까지 찾아와서 성경을 넘겨주고 갔던 이들이 저희들이었음을 말입니다.

그 중국성도들이 자신들에게 생명의 빛과 양식인 성경을 공급해 준 것에 고맙다며 북한성경 배달에 쓰라고 헌금을 모아 손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그들은 성경배달을 위해 파키스탄으로 신장으로 터키로 이스라엘로 떠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북한에 선교활동을 위한 일들을 서슴없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난 30년간 여러분들의 헌신이 이렇게 열매가 되어 북한 땅을 위한 일꾼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기만 합니다.

 

무익한종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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