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편지] 이거이 우리 생명을 위해 쓰여지지 않갔소?

제니스 혹은 지너스라 부르는 라디오를 아시나요? 저는 한때 그런 라디오를 갖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제니스 라디오를 잊고 살았습니다. 제가 컴퓨터를 배운 1968년 이후로 온통 컴퓨터 세상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1983년 겨울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던 날, 흑룡강성의 한 도시에 있는 조선족 가정을 은밀하게 방문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만나야 하는 한 사람을 소개 받았습니다. 약속 장소에 가면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자매가 안경을 쓰고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는 허름한 호텔 앞, 눈발 사이로 26세의 한 여인이 안경을 쓰고 코트를 입고 서 있었습니다. 1983년대의 중국은 안경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안경 쓴 사람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여인은 가볍게 눈으로 인사를 하고 따라 오라고 머릿짓을 했습니다. 가다가 제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고는 몇 걸음 더 걷다가 길을 건너고 다시 건너왔습니다. 그러고는 골목으로 갑자기 들어가더니 다시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눈이 쌓여 발이 푹푹 빠져 걷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안내자는 한참 만에 조그만 골목에 위치한 가게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도 따라 들어갔습니다. 주인과 안내자의 눈짓이 오고 갔습니다. 안내인은 이러 저리 걸려있는 줄 중 하나를 잡아 당겼습니다. 다시 한 번 잡아 당겼습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아무 것도 사지 않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저는 아까 잡아당겼던 줄이 밖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줄 위에는 눈이 쌓여있지 않았습니다. 좀 전에 안내인이 잡아당겨서 눈이 털린 것입니다.
그 줄은 길 건너 벽돌담 지붕 밑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골목을 돌아 뒤따르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그 벽돌담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부엌과 방 사이에는 문이 없었습니다. 부엌에서 물을 끓이면 수증기가 벽으로 이어진 파이프로 들어가서 벽과 방을 따스하게 데웠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그들은 깨끗해 보이지 않는 좀 큰 헝겊을 걷어냈습니다. 그러고는 진지한 어조로 “이것이 저희 영혼의 젖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헝겊에 쌓인 물건은 다름 아닌 진공관 라디오였습니다. 브라운 색깔의 전형적인 제니스 라디오.

 

그들은 라디오로 극동 방송을 듣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들으며 신앙생활을 이어왔다는 식구 중 몇몇은
거기서 자고 바로 아침에 직장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이거이 우리 생명을 위해 쓰여지지 않갔소?” 안테나를 밖에 설치할 수가 없어서 방안에서 안테나 역할을 하는 줄을 이리 저리 옮겨가며 온갖 잡음을 피해 말씀을 듣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예배당을 선택할 수 있고, 목사를 초청했다가 좇아내기도 하고, 성경은 몇 권씩 집에 있고, 그러면서 말씀을 들으려 했던가요? 성경을 읽어 내려가며 회개의 눈물을 흘린 적은 언제였나요?
참 기독교인의 삶을 찾을 수가 있었던가요?

 

저는 밤 10시가 되어서야 그들과 이야기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오는 길에 많이 울었습니다.
나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35년하고도 한 달 전의 일입니다. 결국 그 발걸음이 오늘에 이르도록 이끌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아내도 저도 후회 없이 이 길을 걷도록 도우셨습니다. 추운 겨울에 영하 50도 지역을 수없이 여행하고 시베리아를 며칠씩 다녔습니다. 성도들에게 성경을 넘겨주고 싶어서, 그래야 했기에… 목마른 사슴처럼 헉헉거리며 생명의 물을 찾는 성도들에게 한 권의 성경을 배달하기 위해 그 길을 가야 했습니다.

 

곧 저는 그 지역을 다시 방문할 예정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자랐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이제 그 라디오를 볼 수 없겠지요? 인터넷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테니까요.
그런 집도 없을 겁니다. 아파트로 모두 이사했겠지요.
그 안경 낀 코트 입었던 자매는 어디에 있을는지…

 

그래서 모퉁이돌선교회는 오래 전부터 북한에 있는 성도들에게 방송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말씀에 주린 북한성도들이 이불 속에서, 골방에서, 산과 들, 바다에 나가 방송을 들으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2019년 새해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북한과 중국 그리고 아랍과 이스라엘의 성도들에게 성경이 보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9년 1월 15일
무익한 종 이삭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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