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탈북을 포기한 65명의 북한 성도를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일어나야 합니다. 부르심을 점검해야 합니다.
저 닫혀 있는 그 땅에 들어가 하나님이 유업으로 주신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1985년 늦가을은 선교사로도, 세상적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도 늦은 시점이었습니다.
사업을 중단한 지 6년째에 접어들었고, 목사 안수를 받은 지는 3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아무 후원자나 돕는 분 없이 발을 내디딘 상황이었습니다.
그저 주시는 대로 길을 떠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중국으로의 첫 정탐 방문이 이뤄지고 2년간 하나님의 이끄심을 기다렸습니다.
1985년에야 확실한 인도하심을 받고 현장으로 떠났습니다.
이미 40을 넘긴 늦은 나이였음에도 하나님은 제 가슴에 북한 땅을 향한 길을 열어 놓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사역지에서 저의 부르심을 재확인해 주셨습니다.
“나는 그 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씀에서 “너는?”이라는 숨겨진 언어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국을 떠나왔는데 떠난 게 아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돌아온 게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은 실제로 거기에 남아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이 “아닌 듯”한데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에 대해서는 “예”가 되었습니다.
한 해 두 해가 가고 여섯째 해에 끔찍한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사역을 감당하기에 육체는 힘들었고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때 그만 두었어야 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더 많이 더 계속해야 했을 뿐입니다.
바로 그해 탈북을 포기한 65명의 북한 성도를 만났습니다.
“보냄받은 자리에 남아 주의 뜻을 따르겠다”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고백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고 4년 반 후에 “주님의 뜻에 따르기로 한” 그들의 결과를 알고자 찾아갔습니다.
6명의 젊은이는 보위부원에게 대항하다 매맞아 죽었고, 나머지 59명은 굶고 병들어 죽었으며, 1991년에 세 살짜리였던 손녀도 병들어 죽었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하던 택시 운전사는 흐느끼며 “예수가 무엇이기에…”라며 나도 예수쟁이가 되었노라고 말했습니다.
5년이 지나고 10년, 25년, 그리고 지금 37년 차에 이르렀습니다.
수백 번의 발걸음이 수천 번의 설교와 도전이 되었나 봅니다.
같은 뜻을 품고 기도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젊은이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 선교지로 보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일어나야 합니다.
북한, 중국, 선교지를 유업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 안에서 확인하고
부르심을 점검해야 합니다.
오는 7월에 경기도에 위치한 소망수양관에서 선교 컨퍼런스를 갖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2년 만에 모이는 65회 선교 컨퍼런스에서 하나님께서 유업으로 주신 선교지를
믿음으로 취하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예배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 닫혀 있는 그 땅에 들어가 하나님이 유업으로 주신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곧! 예, 곧입니다.
2022년 6월 15일
무익한 종 이삭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