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칼럼] 왜 그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요?

 

 

소련에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핍박과 아픔 속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허름한 집에 살고 있음에도 얼굴과 눈빛에서 영원한 소망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가난하게 움막 같은 곳에 거하지만 소망 중에 살고 있는 성도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가진 돈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건강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세상의 일이나 소식 또는 농담하는 일에 시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핍박이나 박해받는 일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굶을지라도 양심을 팔지 않았고 그리스도인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성도들도 자신을 짓밟는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복을 빌고는 했습니다. 배고프다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매 맞는다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의 예배를 드린 것 때문에 10년 혹은 20년을 시베리아로 유배를 당할지라도 그 길을 가겠다는 구소련 성도의 말 한마디, “차라리 문화혁명이 다시 와서 사람들의 마음이 청결해졌으면…”하며 한탄하던 중국 성도의 고백이 믿어지십니까? 고난의 행군이 지속되어서라도 북한의 성도들이 거룩할 수가 있다면 그 길을 택하겠노라는 참된 성도의 고백이 들리시나요?
메마른 성도들의 절규가 들리십니까? 집에서 쫓겨나더라도 매를 맞더라도 굶어 죽을지라도 주님만 소망하며 살겠다는 살아있는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부의 탄압과 정통 유대인-종교인들의 신앙적 핍박 속에서도 여전히 여호와를 찬양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직업이 없어 안정되지 않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도 없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며 주님을 높여드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비참한 삶을 사는 이들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곳에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계십니까?
왜 하나님은 제게 남한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가 없다고 하셨을까요?
제 자신부터 한심한 존재였음을 회개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까?
평안함과 부유함과 거짓됨과 위선적인 것과 불교적인 것과 유교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우상숭배와 샤머니즘과 한국문화와 세상과 타협했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들에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왜 소련과 중국과 이스라엘과 북한의 성도들은 타협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매 맞으며 배고픈 그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요?
주님은 네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양이 아닌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양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저는 제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메마른 영혼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가고 싶습니다.

 

무익한 종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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