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칼럼]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2022.11)

사역과 삶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랑과 용서”였습니다.
어려서 성경을 어머님에게서, 교회에서 배웠기에 나 자신의 “의”가 기준이었습니다.
게다가 일본과 중국 그리고 북한에 대한 악감정을 어른들과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제가 해방되는 해에 태어난 세대였기에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북한 땅에서 태어났고 공산주의자들의 횡포를 경험했습니다.
지주였던 외조부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죽도록 매를 맞고 월남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편을 미워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며 성장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님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배우며 고통과 갈등을 느꼈습니다.
학교에서 미움을 교육받았는데 성경은 용서와 사랑을 요구했습니다.
고문을 당하고 나서 “북한 선교?” 하며 코웃음 치는 목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부글부글 증오가 끓어올랐습니다.
아버님은 “누가 이 길이 쉽다고 했냐? 네가 안 하면 누가 하겠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웠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용서와 사랑이 바로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의”가 되어 속사람의 싸움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전쟁을 통해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든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김일성 일당과 그 추종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니…. 그들도 하나님께 용서받고 사랑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만 내가 그들을 용서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내 “의”가 나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평양의 봉수교회에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앉아 있었습니다.
북한인들을 만났고 조선기독교연맹 사람들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다가 그만 그리스도의 사랑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주님이 용서하신 그 사랑 이야기와 함께 나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리려 이곳에 당신들과 마주 앉았노라고 털어 놓았습니다.
내 입술이 분명 말하고 있는데 내 자신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랑의 힘에 끌려서 십자가의 사랑 이야기를 토해 내고 있었습니다.
1988년 북한 사랑 심포지움을 하고 나서도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나를 짓누르는 갈등의 답은 분명했습니다.
용서해야 했습니다.
용서하노라고 선포해야 했습니다.
지난 9월 14~16일 사이에 일어난 일이 그것입니다.
깃발을 휘둘렀다고 소리쳐서 울부짖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내 심장의 깊은 곳에서 “용서”가 선포되기를 원했고, 그날 우리의 입술에서 소리로 발하여 선포되었습니다.
세상 모두는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은 우리 주님이 우리의 아니, 나의 심장 소리를 들으셨음을 믿습니다.
내 속사람의 용서함을 하나님이 아실 것을 저는 압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와 사랑을 우리 입술로 용서하도록까지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너그럽거나 온유하거나 정결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나를 복되게 하사 온유하도록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복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로 입을 열어 사랑과 용서를 선포하도록 이끄셨습니다.
내 속사람으로 “용서”케 하신 그 은혜까지 입히시는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나 같은 죄인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케 하신 그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겠노라고….
할렐루야!

무익한 종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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