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제 기억에 어머니는 신문 한 장을 펼쳐놓고 종일 울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저도 신문을 보며 늘 울고는 합니다. 나라 걱정을 하며 울고, 나라와 이웃을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웁니다.
1967년, 미국에 살게 된 저는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조국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1970년부터 유엔군으로 한국에 와서 근무할 때도 일부러 판문점을 방문했습니다. 제 가슴 속에 한국땅과 북한땅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1983년 처음 중국으로 가서 조선족을 만나는 것이 북한선교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5년, 모퉁이돌선교회를 시작하고 3년 넘게 북한을 깊이 볼 수 있었습니다. 단둥, 하얼빈, 장춘…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 사는 조선족들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냈습니다. 저는 압록강변과 두만강변을 기도처 삼아 기도하면서 평양에 갈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아직도 대북 라디오 방송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제가 태어난 그 땅에 살려두신 지하교회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돌아가는 주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길을 찾아내려고 하나님께 묻고는 합니다.
오늘도 저는 인터넷 신문으로 세상 소식을 접합니다. 북한 소식을 볼 때면 그 안에서 북한주민들의 함성이 들려옵니다. 마땅히 불쌍히 여겨야 할 우리의 이웃입니다.
일정한 금액만 지불하면 이곳으로 탈출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선교지에서 신실하게 선교하며, 해외에서 탈북민들을 위해 수고하는 주의 종들을 봅니다. 그들의 수고가 얼마나 큰지…
저는 여전히 북한의 지하교회와 지하성도들을 돌보며 늘 울고는 합니다. 정말 그들을 사랑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탈북민들을 사랑하지 못해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들이 감사할 줄도 모르고 변명만 하면서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고, 함께 일하는 이들과 함께 일할 줄 모른다고 변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울기만 하는 것으로 사랑하는 것이 될까?’ 스스로 묻고는 합니다.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구제를 하는 것만으로 사랑하는 것일까요? 성경을 가져다 주고 가르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방송하는 것만으로 만족될 수 있는 것일까요?
‘피 흘리기까지’ 라는 말에 대한 책임은 과연 어디까지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뿐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기꺼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입은 우리도 북한을, 중국을, 아랍을, 이스라엘을 사랑함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오늘도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북한성도들과 주민들에게 전하려고 길을 떠납니다.
그들을 만나 외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그 일을 위해 여러분도 함께 울어주십시오.
무익한 종 이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