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칼럼] 남들이 말리는 것을 해야만 했습니다!

 

1952년, 만 일곱 살이었던 저에게 어머님은 ‘북한에 복음을 전하러 가라.’고 하셨습니다. 1962년, 어머니께서는
“예” 라고 답했던 제게 그 일을 상기시키셨습니다. 북한에 가기 위해서는 미국에 가야 한다고 하시는 어머니께 저는 생각도 하지 않고 “예”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어머니께서는 18세의 제게 12세, 7세, 그리고 태어난 지 5일된 동생들을 남기고 별세하셨습니다.
제가 태어난 북한은 저에게 영원한 선교지였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그렇게 제가 북한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하나님 품에 안긴 후 오롯이 중학생, 초등학생 그리고 핏덩어리 동생을 제 손으로 키워야 했기에 어머님과의 약속을 잊고 살았습니다. 게다가 1967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언어를 배우고, 직장 생활을 하고, 징집을 받아 미군에 입대를 해야 하는 등 살아가는데 치열한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다행히 제대 후 시작한 사업이 잘 되어 생활은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 도착한 때부터 우리를 도와주셨던 미국인 목사님이 제게 어린 시절 어머님과 했던 약속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사실 저는 이웃들이나 교회에서 어머님과의 약속이나 가족들이 어떻게 미국에 오게 되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교회에서 주어진 일을 조용히 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교회생활로 바삐 지내던 중, 신학교에 갈 것을 제안 받게 되었는데 결국 저는 하던 사업을 중단하고 신학교에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기 전, 선교정탐여행을 동남아로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1983년, 중국에 다녀오고 난 후에 저는 여러 곳에서 담임목사로 초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2년 동안 저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퉁이돌선교회’를 미국 연방정부에 등록하고 혼자 방송국에 가서 영어 복음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에 다녀 온 후에는 무엇인가 저를 압박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결국 1985년 9월 29일, 사표가 수리되기도 전에 저는 마지막 설교를 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한 달 후인 10월 28일, 저는 서울로 돌아와 한국 모퉁이돌선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친척과 친구들, 저를 키워 준 교회의 어른들도 북한선교를 반대했습니다. 오히려 ‘목을 졸라 죽여야 할 북한에 무슨 선교냐’고 꾸중을 들었습니다.
사업으로 번 돈을 모두 헌금한 상태에서 적당한 수입조차 없던 저는 아홉 살된 큰 아이의 생일을 앞두고 미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둘째는 석 달 후에 여덟 살이 될 터였습니다. 후원하는 교회도, 선교회를 인정하려는 어느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소련, 몽골 그리고 북한을 선교한다고?” 모두가 반대했습니다. 당시 소련과 몽골, 그리고 중국은 한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미국 시민권이 있었고 그것으로 방문이 가능했지만 사역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게는 선교지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큰 부담이 있었습니다. 갈급함으로 울부짖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물이 저를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들을 모른 체하고 제 마음에 감춰 둘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가야만 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다 주어야 했습니다. 저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가져다 주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성경 가져다 주는 게 무슨 선교냐.’고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교한다.’ 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저 또한 선교지에서 선교사로 사는 것이 선교라고 배웠으니까요. 그렇지만 성경을 당장 읽어야 하겠다는 그들을 모른 체 할 수 없었기에,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달해야 했습니다.
저를 비난하는 그들과 싸우고 변명하고 이해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의 필요를 보았고, 한 권 한 권의 성경책을 가방에 넣어 그들에게 가져다 주어야 했습니다. 중국 땅에 조선족 교회가 단 두 개, 가정교회는 2,300개 정도일 때의 이야기입니다.

 

현장에서 돌아와 서울과 미국에 그들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렇게 32년 동안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남들이 하지 말라는 것을 저는 해야 했고, 그들이 위험하지 않냐고 할 때, ‘그렇다면 어떤 일이 위험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하고는 했습니다. 사실 저는 매도 많이 맞았고, 감옥에서 고문도 당했고, 심장에 무리가 오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랬듯 몸이 연약해서 비실비실하던 제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2007년, 의사는 제게 ‘급사’상태라고 진단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로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살아남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퉁이돌선교회를 통해서 저에게도, 공산권 지역의 성도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믿어준 성도들에게 복 받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은혜일 뿐입니다.

 

무익한 종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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