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북한에서 그루터기 성도가 가진 성경을 직접 보았고 복음을 들었습니다. 저에게 복음을 전해준 그루터기 신앙인은 1959년 북한 정권의 교회 탄압으로 인해 국경 지역에 강제 이주되었는데, 그분에게서 신의주 제6교회의 역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신의주 제6교회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북한 교회사를 연구하는 전문가에게도 문의해 보았지만 관련 내용을 그 어디서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북한에 신의주 제6교회가 존재한 것은 사실입니다. 저에게 복음을 전해준 분의 할아버지가 신의주 제6교회의 장로를 지내셨고, 그분의 아버지가 신의주 신학교 등에서 신구약을 가르친 교수이셨으며, 그분의 어머니는 신의주 제6교회에서 피아노를 치셨습니다.
북한의 교회 박해는 신의주 교회 같은 지방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평양은 사회 지도층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어서 교회부터 없애면 이제 갓 잡은 정권을 공고히 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탄압받는 지방 교회 선생님들이 평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저에게 복음을 전해준 분의 아버지도 그 당시 평양 교회, 장대현 교회 등에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심지어 초가집 같은 작은 교회에서도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듣고 가고, 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서 듣고 하는 식으로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계속해서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후에는 평양도 교회에 적대적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저에게 복음을 전해준 분의 아버지는 신의주로 다시 가서 가정교회를 순회하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분은 예배를 드리다가 체포되셨는데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하 조그련)에 가입하라는 협박을 받고도 끝까지 거부하셨습니다.
리기선 목사님도 조그련 가입을 거부한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리기선 목사님은 해방 이후 많은 북한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월남한 상황에서 교역자가 없는 신의주 제6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하시고 부흥회를 인도하셨습니다. 이분은 일제시대 때 신사 참배를 반대해 7년간 평양형무소에서 옥중 생활을 하셨고, 조그련 가입과 교회에 인공기 게양을 반대하며 성도들에게 ‘남조선에 가지 말고 이 땅에서 우리가 교회를 지킵시다’라고 호소했습니다. 리기선 목사님은 신의주 마을마다 몇 개의 가정 처소를 만들어 놓고 다니며 교인들을 목양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1958년, 교회와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의 바람이 휘몰아쳤습니다. 북한은 조그련에 편승한 교회도 전부 다 없애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섬기던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 교회 중직자들을 선별해서 추방시켰습니다. 그런데 추방된 그곳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모여서 몰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북한 당국이 추방된 기독교인들이 감시망을 피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1970년대, 비밀리에 교회를 관리하던 리○○ 목사를 북한 보위원들이 검거하고 예배 처소를 알아내려고 고문했지만 그는 발설하는 대신 순교를 택했습니다.
리○○ 목사가 순교하자 북한 당국은 리○○ 목사의 집을 수색했습니다. 당시 리○○ 목사의 집에는 성경책과 기독교 서적이 가득했습니다. 보위원들은 가족에게 책들을 마당으로 가지고 나오라고 했고, 그 위에다 석유를 붓고 불을 붙였습니다. 그때 리○○ 목사의 아들이 책을 안고 옮기던 중 발등에 한 권이 떨어졌는데 재빨리 발로 차서 널마루 틈에 밀어 넣었습니다.
보안원들이 돌아가고 난 다음 널마루에 떨어진 책을 살펴보니 성경이었습니다. 세로줄로 된 한자 성경이었는데 리○○ 목사의 아들은 표지를 떼고 따로 보관하면서 계속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한자에 능통한 그는 토씨만 한글로 된 한자 성경을 줄줄 읽었고 거의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저는 표지가 없는 그 성경책을 보았고 그와 함께 창세기와 마태복음을 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박해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박해 속에서 오히려 더 순수해지고 정화되고 분명해져서 사람들에게 전도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아시기를 바랍니다.
*복음문화교회를 담임하는 탈북민 김광석 목사가 제69회 모퉁이돌 선교 컨퍼런스에서 북한의 지하교회가 실재함을 증거했다. 당시 강의 중에 언급한 신의주 제6교회의 역사와 신앙에 대한 부분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