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콤특집] 북한 선교의 전도자, 조선족 (2023. 7)

모퉁이돌선교회를 시작한 1985년 이삭 목사가 만주에 있는 조선족 사역자들에게 성경을 배달하고 돌아서면서 받았던 부탁이다. 이것으로 본회의 북한 선교가 시작되었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북한과 국경이 맞닿은 중국의 길림, 요녕, 흑룡강성 등에 거주하는 조선족 교회와 성도들이야말로 북한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지나면서 북한을 비롯한 선교지의 환경이 달라지고 있다. 이에 따라 본회는 2023년 ‘나라에서 민족’ 즉 국가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선교 전략의 변화를 결정했다. 이로 인한 전술의 변화 중 하나가 ‘조선족을 통한 북한 선교’이다. 본회는 조선족으로 오랫동안 중국과 북한 그리고 한국을 오가며 북한 선교를 감당해 온 일꾼 부부를 만나 지금까지 어떻게 북한에 가서 성도들을 만나고 실질적인 선교가 이루어졌는지를 듣고, 앞으로 조선족 교회와 성도들의 역할에 대해 정리하였다.

보따리 장사가
북한 선교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북한 돈으로 신학을 했습니다. 1987년에 신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학비가 1200원이었습니다. 당시 한 달 월급이 26원이었습니다. 정말 가난했지요. 그래서 아내가 북한에 가서 보따리 장사를 했습니다. 그때는 북한에 편지 한 통만 보내면 친척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그렇게 친척 방문을 신청해서 북한에 들어가 한 번 장사하면 6개월 생활할 돈이 벌렸습니다. 보따리 장사가 어마어마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이 자연스럽게 따라서 들어갔습니다.”

조선족 사역자는 오래 전 기억의 한 조각을 꺼내들었다. 두만강에서 압록강까지 북한과 인접한 중국의 길림, 흑룡강성, 요녕성 지역은 조선족들이 살아가는 자치구이다. 중국 단동에서 압록강을 사이에 둔 북한 신의주가 건너다 보이고, 장백에서는 강가에 빨래하러 나온 북한 혜산 주민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육안으로 장마당까지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두만강 너머 중국 도문에서 다리를 건너면 바로 북한의 남양 세관에 도착한다. 그만큼 수월하게 조선족들은 북한에 친척 방문을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를 채택한 북한과 중국은 혈맹 관계로 맺어져 있어서 조선족 중에는 이민자로 북한에 이주한 사람이 많았고, 외부 세계와 철저하게 차단된 북한임에도 중국 국적을 유지한 화교들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자유로이 중국에 오갈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경제적인 활동을 빌미 삼아 북한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만나는 은혜를 누리게 하셨다.

믿는 지하교회 성도를 만났습니다!

중국에서 북한으로 떠나는 보따리 장사는 거의 대부분이 물물교환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우리가 만난 조선족 일꾼 역시 북한의 남양, 회령, 혜산, 신의주 등 여러 지역을 방문할 때 해산물과 중고 컬러 TV 등을 가져가서 팔고, 북한에서는 일제 중고 TV 등을 사 가지고 와서 중국에 팔았다. 먼저는 친척으로 등록된 집에 도착해서 가져간 물건을 북한 사람들에게 준 다음 그 후에 그들에게서 돈을 받았다. 그때는 물건을 가져간 사람으로부터 돈을 받는 데 한 달이 걸리기도 했다.
장사하러 북한에 들어간 일꾼의 아내는 그곳에서 믿는 할머니를 만났다고 했다. 그 할머니로부터 들었던 말씀의 감동은 지금까지를 통틀어서 최고라고 전해주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듣고 싶다고 일꾼에게 부탁했다.

“1993년이었습니다. 장사를 떠났던 저는 한 달 동안 북한 00시에 있는 할머니 댁에 머물렀습니다. 하루는 제가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하며 찬양을 흥얼거리는데 작은 소리로 할머니가 따라서 불렀습니다. 찬양을 마치고 나서 할머니는 제 가까이에 와서 두 손으로 귀를 가리고는 ‘네가 예수 믿는구나’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조심스럽게 장롱 깊숙히 숨겨 놓은 사진첩을 꺼내서 보여주었습니다. 빛 바랜 사진이었는데 옛날 예배당 십자가 앞에서 찍은 주일학교 시절의 사진이었습니다. 보물처럼 간직하는 사진이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할머니와의 믿음의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옛 추억을 더듬으며 회상하는 일꾼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져 갔다. 일꾼의 아내는 할머니와 친분이 쌓이자 중국에 와서도 편지로 계속 소식을 주고받았다고 했다. 믿는 성도임을 알게 되면서 할머니에 대한 신뢰가 생긴 일꾼의 아내는 또 다른 조선족 자매를 그 할머니와 친척 관계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일이 준비되었을 때 곧바로 일꾼의 아내는 그 자매와 함께 물건을 마련해서 북한을 방문했다.

찬송과 말씀이 생수의 강이 되어

“두 번째로 가니까 이미 마음이 많이 열려 있었습니다. 할머니와 식구들은 저와 함께 갔던 자매까지 친 가족처럼 맞아주었습니다. 저희는 장사하려고 가지고 간 물건을 다른 중개상에게 보냈는데 물건값이 돌아오기까지 28일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매일 할머니와 함께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숨을 죽여가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할머님이 전해주시는 성경 말씀을 듣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찬송가를 모두 암송해서 부르셨고, 성경책 없이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마음속에 새겨진 주의 말씀이 생수의 강이 되어 흘러 나와 저와 자매의 영혼에 시원하게 스며들었습니다.”

일꾼은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자신이 지금까지 드린 예배 중에서 OO 지역에 있던 그 할머니의 집에서 몰래 드린 예배가 가장 은혜로웠고, 가장 은혜를 받았던 말씀 역시 바로 할머니를 통해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눈가를 촉촉히 적셨다.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는 부분을 들려 달라고 일꾼의 아내에게 요청했다.

고난은 잠깐이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니 얼마나 좋으냐

“할머니가 반복하여 전해주신 말씀의 주제는 사람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아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할머니에게 북조선에서 숨죽여 하나님을 믿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에 현재 받고 있는 잠시 잠깐의 고난은 영원한 세계에 비하면 한 점에 불과해. 이 짧은 고난을 믿음으로 잘 통과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예비해 놓으신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게 되지. 그러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찬송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며, 죽은 후에는 반드시 부활되어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우리는 하늘나라 아버지의 집에서,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니 얼마나 좋으냐… 너희들도 믿고 나도 믿는데, 이왕이면 옛날처럼 마음 놓고 예배당에서 찬송 부르면서 예배 드리다가 세상을 떠나가면 좋으련만…’ 하고 말씀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시고는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그래도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당에서 예배드리면서 성장했기에 지금도 믿음으로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지 못한 요즘 사람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야! 주님이 허락하시면 북조선에서도 다시 교회당이 세워질 거야!”라고 할머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북한에 가서 들었던 말씀의 감동이
35년이 지난 오늘까지 남아

일꾼과 일꾼의 아내가 처음 북한을 방문한 것은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믿음의 성도들을 만나게 하셨다. 숨죽인 채로 지나온 50년 고난의 세월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고, 고난은 잠깐이고 장차 천국에서 주님과 누릴 영원한 삶이 있기에 콧노래를 부르며 즐거움으로 찬송한다는 북한 할머니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감동이 흘러 넘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의 집에서 28일을 머물며 소리가 밖으로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교제하며 조용히 숨을 죽여가면서 예배를 드리던 광경을 떠올릴 때면 35년이 지난 지금도 새 힘을 얻는다고 일꾼은 말했다.
이후 신학 공부를 마친 일꾼과 아내에게 본격적인 북한 선교 확장의 길이 열렸다. 하나님은 북한에 갈 수 있는 여러 기회를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해방 전부터 믿음을 지켜왔던 그루터기 성도들을 만나도록 이끄셨는데, 북한이 공산화되고 50년을 지나는 동안 믿음을 지킨 성도들이다. 그들은 모두 성경책이나 찬송가가 없고, 암송하는 찬송과 말씀을 되새김질하며 신앙을 지켜 오고 있었기에, 말씀을 전할 때면 갈급한 심령에 위로가 되고 영혼의 생명수가 되는 것을 보았다. 또 어떤 이들은 잃어가는 믿음을 다시 일으키는 은혜를 누리는 감격을 맛보았다. 이에 대해 일꾼은 “성경에 누구를 만나든 무슨 말을 할지 염려하지 말라 성령께서 그때 할 말을 생각나게 하리라는 말씀이 북조선에 가서 성도를 만났을 때 매순간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이 밖에도 개인이 아닌 교회 차원에서 만주 지역의 조선족 성도들로 하여금 북한 선교에 대한 사명과 열정을 갖도록 도전하고, 북한에서 식량을 구하러 나온 수많은 백성을 돌보고 위로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게끔 역사하셨다.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신실한 조선족 사역자들과 성도들을 통해 북한에서 나온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굳게 세우는 사역을 오늘까지 행하도록 인도하셨다.

이제부터 전도자 빌립으로 살아가리라!

코로나 팬데믹으로 국가와 국가, 지역과 지역 간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일꾼은 다음 단계의 사역을 어떻게 할지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해 왔다. 그러던 중 지난 1월, 이사야 60장의 말씀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 하나님이 나보고 일어나라고 하시는구나. 그러면 하나님 일어나서 뭐해야 합니까?” 하고 기도하는데 “마태복음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고,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이 하는 사역을 네가 하라. 네가 이제는 전도자 빌립으로 살아라”는 말씀을 주셨다.
성경을 펼치고도 뜻을 몰라 설명이 필요했던 내시와 하나님의 말씀이 알고 싶어 몰래 찾아왔던 북한 성도들에게 말씀이 전해질 때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제 전도자 빌립과 같은 확실한 부활 신앙을 가진 조선족 사역자들을 일으키시어, 그들로 앞에 놓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콧노래로 찬송하며 기뻐하는 북한의 OO 할머니와 같은 믿음의 용사들을, 조선땅 곳곳에 가득하게 하시기를 믿음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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