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사의 죽음과 오벧에돔의 복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해 봉사하던 사람들이 사무엘서에 나온 웃사의 이야기를 읽다가 충격에 빠지게 된다. “거룩한 하나님의 궤에 함부로 손대서 웃사가 죽었다면, 70년 가까이 궤를 모시면서 과연 그들이 한 번도 궤에 손대지 않았을까? 그동안은 아무 일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비극이 벌어졌을까?”
히브리어 원문을 읽다 보면 웃사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는 새 수레를 ‘이끌고’
‘몰고’ 언덕 위에 있는 집에서 나왔다. 그런데 하나님의 궤는 레위인 중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고(출25:14, 신10:8)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이때 “거룩한 어떤 물건을 만지면 죽게 된다(민4:15)”. 웃사는 궤를 어깨에 메지 않고 이동 중에 만졌기 때문에 죽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궤가 아비나답의 집에서 떠나는 모습을 한 번 그려 보자. 소의 고삐를 잡고 ‘이끄는’ 아효와 수레에 실린 법궤를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뒤따르는 웃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우리 아비나답 가문 말고 누가 감히 하나님의 궤를 이동할 수 있단 말이야? 70년 가까이 팽개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레위인의 법도를 따진다고? 어림도 없지….” 하는 웃사의 코웃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웃사의 속마음을 성경 기자는 이렇게 고발한다.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비틀거리자 웃사가 ‘몸을 던져’ 하나님의 궤를 ‘움켜 잡았다’(6절)” 대부분 성경에는 ‘손을 들어’라는 구절이 포함돼 있는데 원문에는
“보내다”는 의미의 동사가 쓰일 뿐이기에 ‘몸을 던져’로 이해하는 것이 좋으며, 궤를 ‘붙들다’는 ‘소유’의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움켜 잡았다’고 표현한 것이다. 바로 이 두 단어가 두 번째 힌트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도 70년 가까이 관심도 기울이지 않던 여호와의 궤를 끝까지 지켜낸 웃사와 그 가족의 수고는 인정받아야 마땅하지만, 레위인이 어깨에 메고 이동해야 한다는 여호와의 명령조차 바꿀 만큼인가? 레위인들이 궤를 메고 가면 자신의 가문의 수고가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새 수레를 만들 것을 고집하며 궤 앞뒤를 옹위하면서까지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한 웃사의 ‘행위’를 하나님이 치신 것은 아니었을까? 이와 대비하여 어쩔 수 없이 여호와의 궤를 모시게 된 오벧에돔과 그 집에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다.
믿지 않은 모세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 번 하나님께 불순종했다. 가데스 지역에서 물이 없어 이스라엘 백성이 분통을 터뜨릴 때,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온 회중 앞에서 지팡이를 잡고 바위에게 명령하면 그 바위가 물을 낼 것이다(민20:8)”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화가 난 모세는 소집된 백성 앞에서 “너희 반역자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해 이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해야 하겠느냐?”라고 말하며 지팡이로 두 번 바위를 내리쳤다. 이때 많은 물이 바위에서 나와 백성과 가축이 마실 수 있었지만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엄중히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의 눈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주는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민20:12)”라고.
수시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온 모세의 수고보다 모세의 과오가 더 컸던 걸까? 지팡이를 잡으라고만 했지 치라는 명령은 없었는데 두 번이나 지팡이를 내리쳤기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다고 봐야 할까? 본문을 자세히 보면, 모세의 잘못에 대한 직접적이고 명확한 언급 없이 ‘너희가 나를 믿지 않았다’는 구절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 백성의 의(義)를 정하는 율법을 하나님에게서 받아 백성에게 전한 모세가 ‘믿음이 없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가나안 땅을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율법이 없는 시절을 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는 은혜를 받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경을 살펴 보면, 율법이 주어지기 전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의 삶을 사는 것과 율법 아래에 있으면서 믿음이 부족한 ‘행위’를 구별함으로써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라도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 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반하여, 율법이 주어진 후인데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들의 행위가 믿음이 없어서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익한 종’에 관하여 구약 성경이 묘사한 이 두 가지 사건에는 한 가지 공통된 사실이 있다. 바로 ‘율법의 행위’가 하나님 백성의 의(義)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은 믿음이 의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율법의 준수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구약 성경에 ‘행위’가 아닌 ‘은혜’를 강조하는 말씀이 많다는 사실은 구약 성경을 ‘은혜의 복음’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들의 행위가 믿음이 없어서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아스 목사(본회 교육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