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콤특집 2] 우리가 악에서 떠날 때 북한 땅이 회복됩니다!

[ 제63회 컨퍼런스 둘째 날, 고승희 목사의 성경공부 시간에 나눠진 내용입니다 ]


컨퍼런스 주제가 “악한 자에게서 건지소서”입니다. 우리는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 악의 세력이 북한 땅을 장악하도록 하나님이 두고 계시는가! 능력이 부족하셔서입니까?
고린도후서 10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우리의 복종이 온전케 될 때에 악한 자가 주리를 튼 견고한 진을 멸하고 악한 자를 몰아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역대하 7장 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고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 것이라” 먼저 내 백성이 악한 길을 떠날 때 우리 동포가 사는 북녘 땅을 고쳐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 선지자, 목사, 선교사 노릇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모른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주어가 ‘내’가 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한 내 일인 것입니다. 주의 이름만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수많은 인물들 속의 악을 벗겨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400여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온 에서가 도열한 자녀들을 보면서 “얘들은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야곱은 “내 겁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주의 종이 된 저에게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이 많은 아들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소유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다니는, 내가 목회하는 교회가, 내 교회라면 하나님은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악하게 보십니다. 사업도 그렇습니다. 내가 일구고 키운 내 사업체를 돌보는 것은 악하지만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을 돌보는 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어떻습니까? 내 자녀이기 때문에 열심히 돌보는 부모를 하나님은 아름답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요셉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가서 이야기합니다. “형들이 양을 잡아 먹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는 안 잡아 먹었는데 저들은 잡아 먹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과 볏단이 내게 절하더라.” 내가 최고이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받을 때도 요셉은 “당신은 그런 여자일지 몰라도 나는 악을 행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감옥에 보내십니다.
감옥에서 요셉은 “나 억울하다. 나는 죄가 없다”라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나 바로가 해몽을 위해 요셉을 불렀을 때 그는 “꿈을 해석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형들에 대한 원망도, 원한도 사라졌습니다. “형들이 나를 미워해서 애굽의 종으로 팔아 넘긴 게 아니라 하나님이 큰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 나를 애굽으로 먼저 보내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왜요? 머리카락 하나까지 헤아리시는 하나님께서 인생의 걸음 걸음을 인도해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입니다. 요셉의 악이 벗어지자 애굽 총리로서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악에서 벗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악으로 꽉 찬 북한 땅을 고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겸비하여 악한 길에서 떠날 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그 땅이 고쳐지는 것 아닙니까?
야곱을 보십시오! 형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러자 기세등등하게 오던 에서의 얼굴이 바뀝니다. 북녘 땅이 에서라면 우리는 야곱 같은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가 변할 때 남쪽을 죽이려고 두 주먹 움켜쥔 북한이 형제로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은 아름다운 환상을 묘사합니다. 성전 위에 하나님의 임재가 임합니다. 성전에서부터 물줄기가 흘러 무릎에 차고, 허리에 차는 강을 이룹니다. 그 물줄기가 사해로 가니까 사해가 살아납니다. 사해에서도 가장 피폐했던 엔게디와 에네글라임까지 어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죽음의 바다와 같은 북한을 이렇게 살려 가시기 원하십니다. 그 회복의 시작점이 어디입니까? 우리가 악한 길에서 떠나 겸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리입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님의 임하심으로 내 힘으로는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이 있을 때, 성소에서부터 생명의 강이 흘러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이 되어서 악에서 떠나십시오! 스스로 겸비하여 기도하십시오! “북녘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그곳 백성들로 볼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구할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 땅에 묶인 죄들을 용서하고 그 땅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일이 악함을 깨닫고 미래와 자녀, 물질 등을 염려한 죄를 회개했습니다.
에서가 변화된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삶의 주인으로 섬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북과 남의 관계로 말씀하신 것이 은혜였습니다.
악에서 떠나기를 바라지만 우리에게 그럴 힘이 없음을 고백하며, 성경 속 인물들의 악을 제거하신 하나님께 소망이 있음으로 인해 감사했습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하나님은 우리와 이 땅을 고쳐 주실 것인데 그러려면 내 안에 내 의가 아닌 오직 예수님이 계셔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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