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콤소식 2017.9. 특집1]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죄악을 회개합니다!

 

우리는 지난 8월 ‘카타콤소식’에 일제강점기 일본이 우리민족에게 자행한 죄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용서하는 내용을 다루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가 해결해야 하는 더 중요한 문제가 있음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한국교회가 자발적으로 신사참배를 결행한 죄악을 구체적으로 자복하고 회개할 것에 대한 촉구이다. 이번 호에서는 신사참배를 자행했던 한국교회와 우리의 부끄러운 수치를 낱낱이 드러내고 그것에 대해 회개하고 돌이킴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통일을 주도적으로 감당해 가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그 내용을 정리하였다.

 

1915년 일본이 장악한 조선총독부는 교육과 종교의 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기독교학교의 종교교육을 완전히 금지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의 결과로 미국 워싱턴에 4년 간 체류하면서 교회도 나가고 영어로 일기도 쓸 정도로 어학실력을 갖춘 지미파인 사이토(齊藤實)를 1919년 9월 제3대 조선 총독으로 임명했다. 사이토는 부임하자마자 적극적으로 선교사 회유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기독교학교의 종교교육을 허가하면서 지정학교제도를 시행했다. 이는 기독교학교를 인정하여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제도이다. 이 제도를 통해 기독교학교가 식민지 교육체제로 귀속되기 시작했고 경신학교, 계성학교, 신흥학교, 신성학교 등의 기독교학교들은 지정학교로 인가된 이후 일제가 요구하는 교과과정을 따르기 시작했다.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는 지정학교로 인가 받기 위해 총독부의 시혜를 바라는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아시아·태평양 침략전쟁 시기에 기독교학교들은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12년 3월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을 공포하면서 식민지 조선에 부동산 등기제도를 실시하여 부동산에 관련된 제반 사항은 등기를 통해 이루어졌고,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1918년부터 실질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에 기독교단체의 법인설립을 허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선교사 회유정책의 핵심전략 중의 핵심이었다. 1924년 조선총독부는 기독교 여러 교파의 책임자들을 불러 법인설립을 허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선교회의 법인설립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미국 북장로교선교부, 미국 남장로교선교부, 미국 남감리교선교부, 미국 북감리교선교부, 캐나다 장로교선교부, 호주장로교선교부 등의 선교부가 이 시기에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세금감면의 혜택, 즉 30/1000 비율이었던 세금이 5/1000의 비율로 감면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선교사 회유정책의 결과 선교사들은 조선총독부에 협조하는 태도로 전환했다. 한국감리교의 감독(1916-1928)을 지냈던 웰치(H. Welch) 선교사는 사이토 총독을 ‘기독교 정신의 구현자’라고 불렀다. 스코필드(F. W. Scofield) 선교사는 식민지 조선의 지도자들에게 “공연히 일본 통치를 공격만 하지 말고 스스로 고치고 타일러 민족을 위한 길을 찾아보시오. 당신네들은 일선(日鮮) 공존공영의 필요를 인정하고 온전한 사상을 가지는 것이 이로울 것”이라고 타이르기도 했다. 재단법인의 설립으로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는 기득권을 지킬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조선총독부의 전면적인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는 ‘일본적 기독교의 확립’, ‘국체에 적합한 야소교’로 나타났으며 열매가 ‘종교보국’이라는 미명 하에 시행된 신사참배와 전쟁협력이었다.

 

‘일본적 기독교의 확립’, ‘국체에 적합한 야소교’는 일제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1944년에 시행된 징병제를 정당화까지 했다. “조선 기독교인들이 중국에 파병되어 있는 일본군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위문대를 보내는 운동은 그 발상만으로 칭찬받을 만한 일”(『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427-428쪽)
“우리들은 일본제국 신민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감이 없지 않지만, 좌담회 등에 의하여 황군은 우리들 때문에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1937년 11월 6일 함경북도 박석홍 기독교인) 해방 후에 연세대 총장을 역임한 백낙준 박사는 요한복음 2장 16절의 내용, 즉 예수가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가리킨 장면을 천황에 대한 보은 논리로 차용했다. 그는 병역을 국민의 가장 숭고한 의무라고 강조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에게 징병제에 적극 동참할 것을 강권하였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 ‘내 아버지의 집’인 성전을 수호했듯이 우리도 일본을 결사 수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백낙준, ”내 아버지의 집”, 『기독교신문』, 1942년 5월 20일자)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의 총무 김종대 목사는 사도 바울이 로마 영토 내에서 전도를 하기 위해 유대인의 이름인 사울을 버리고 로마인의 이름인 바울로 개명했듯이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인들도 창씨개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바울이 전도의 언어로 모국어가 아니라 헬라어를 사용한 것처럼, 우리도 일본어를 적극적으로 배워 전도의 기회로 삼자고 주장했다. 그는 사도 바울의 서사를 동원해 창씨개명, 대동아공영권, 일본어 사용을 중심으로 하는 일제의 내선일체 기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1940년 일제 경찰이 마련한 <기독교에 대한 지도방침>에 따라 1942년 12월 감리교회는 가장 먼저 구약성서 폐기를 선언했다. 1943년 5월 5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은 구약성서에 나타난 유대사상을 없애기 위해 적당한 해석교본을 편찬할 것을 결의했다. 1943년 10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도 설교시간에 구약성서와 요한계시록을 사용하지 않고 4복음서만을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이렇게 일제가 구약성서를 말살하려고 했던 이유는 구약성서 특히 예언서에 담긴 저항적인 메시지를 제거하고 그 정신을 거세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가 자신들의 지배에 대해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기를 기도(企圖)했다. 심지어 윤치호는
“아모스와 같은 히브리 예언서는 읽기 어렵다. 나는 신이 저와 같이 욕설하는 말투로 비판했다고는 정말로 믿기 어렵다, 그러한 품위 없는 말씀을 사용했을 리가 없다.”(역사비평사, 2001)고 주장했다.

 

1940년 11월 10일 장로교 총회장 곽진근 목사는 장로회 총회 간부들과 함께 이른바 “조선예수교 장로회 혁신요강”을 발표했다. 이 혁신요강의 제5조 3항에는 “찬미가 기타 모든 기독교 관계 서적 출판물의 검토를 하여 국체에 배반되는 자구를 개정할 것”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요강에 따라 진행된 찬송가 가사의 개정과 삭제가 1942년 1월 20일부로 종교교육부 총무 정인과 목사의 명의로 “신편찬송가 정정 사용 주지의 건”이라는 긴급통고문을 발표하고 실행되었다. 이렇게 찬송가 가사를 개정하거나 삭제한 예를 들면, 일제의 “천황-신민”이라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는 “왕, 대왕, 만백성, 백성, 임금, 구주, 구세주, 만유의 주재, 다스리시네” 등 하나님의 통치권과 관련되는 단어는 ‘주, 주님-사람, 보살피시네’ 등으로 바꾸었다. 또한 영적인 전투, 군사와 관련된 단어인 “군병, 충성, 싸우라” 등은 “일꾼, 정성, 일하라” 등으로 바꾸고, “십자가 군병”이나, “내주는 강한성”,
“믿음이 이기네”,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심지어는 주기도문 영가까지도 전장을 삭제했다.

 

장로교는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12월 12일에는 장로회 총회장 홍택기와 부회장 김길창이 감리교 총리사 김종우와 전 총리사 양주삼, 성결교 이사장 이명직과 함께 일본의 이세신궁, 메이지신궁, 가시하라신궁, 아츠다신궁, 야스쿠니신사 등을 두루 참배하려고 일본으로 떠났다. 1939년 9월 10일 제28회 총회 결의에 의하여 3천여 교회가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맹하여 ‘종교보국’의 실적을 올렸다. 동시에 시국에 맞추어서 외국인 선교사의 기반(羈絆)을 벗어나 진정한 ‘일본적 기독교의 확립’, ‘국체에 적합한 야소교’로 전향하는 길을 능동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단히 놀라운 것은 총회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기 이전부터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독자적으로 신사참배를 실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무려 장로교의 74%가 이미 신사참배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또한 신사참배를 총회 차원에서 결의하기 전부터 전승축하회 86회와 무운장구기도회 2,042회를 실시하고 국방헌금 454,539원을 모금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의 조선기독교의 신사참배를 일제의 강요라는 외적 요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의하게 되었다는 옹색한 논리는 사뭇 무색해질 수 밖에 없다. 신사참배에 대한 일본의 외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기독교 부흥역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던 한국교회가 개인 혹은 총회차원에서 자발적인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죄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해방 후에도 이 부끄러운 죄악에서 돌이키는 것은 고사하고 오랫동안 신사참배 한 죄악을 은폐하며 오늘에 이른다. 물론 몇몇 개인과 교단이 부분적으로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 이 죄악에 대해 아직까지도 묻어두고 있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교회와 성도는 없다. 심지어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던 성도라 할지라도 그러하다. 이 죄악은 너무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부분이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반드시 회개하고 돌이켜야만 하는 문제이다. 해방과 함께 분단되어 아직까지도 피 흘리는 우리민족의 역사가 한국교회가 해결하지 못한 신사참배의 죄악으로 인한 것은 아닐까?

 

그러하기에 통일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지금 느헤미야 1장 6~7절에 “이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가 일제강점기 한국교회가 일본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신사참배한 죄악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비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라며 제사장적 기도로 나아갑니다.

송재선 목사(본회 연구원 부원장)

 


 

 

1. 신명기 4장 19절에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 경고하신 하나님, 1919년부터 사이토 총독의 회유정책에 넘어가 기독교학교들이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전락했던 죄악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신하여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2. 고린도전서 6장 10절에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주여, 1924년부터 미국, 캐나다, 호주 등 대다수의 선교회가 재단법인을 설립하면서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받으려고 선교사들이 조선총독부에 협조하고, 조선교회로 하여금 신사참배와 전쟁협력에 따르도록 권고한 죄악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신하여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3. 이사야 56장 11절에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말씀하신 여호와여,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1944년에 시행된 징병제를 ‘내 아버지의 집’인 성전을 수호했듯이 일본을 결사 수호해야 한다고 정당화하며 일본군에게 성탄절 선물로 위문대를 보내는 운동을 전개하고, 창씨개명, 대동아공영권, 일본어 사용 등을 주장하며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조선교회 목회자와 지도자들의 죄악을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4. 이사야 59장 21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신 여호와여, 1942년 12월 가장 먼저 구약성서 폐기를 선언한 감리교회, “교단의 경전은 신약성서로 하고 구약성서에 있는 유대사상을 제거하기 위해 구약해석교본을 발간”(1943년 4월 초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단, 일본기독교조선교구의 대표로 구성된 제2회 교파합동위원회에서도 합동될 교단의 명칭을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 1943년 5월 5일 구약성서에 나타난 유대사상을 없애기 위해 적당한 해석교본편찬을 결의한 조선장로교단, “교단 혁신의 정신을 반영하여 유태사상을 배제하고 순복음으로서 교의를 선포하기로 교단규칙”, “예배 설교 또는 교의를 선포할 때에 구약전서와 신약의 묵시록은 사용치 아니하고 〈4복음서〉에 기인해서 교의선포를 하기로 각 교회 주관자에게 교단 총리로부터 통첩”(1943년 10월 감리교단 총회 결의) 등 일제가 예언서에 담긴 저항적인 메시지를 제거하려고 구약성서를 말살하는 정책을 지지하고 따랐던 한국교회의 죄악을 대신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5.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말씀하신 하나님, 1940년 11월 10일, ‘조선예수교 장로회 혁신요강’을 발표해 찬송가 가사를 개정하거나 삭제해 “천황-신민”이라는 천황제에 위배된다며 “왕, 대왕, 만백성, 백성, 임금, 구주, 구세주, 만유의 주재, 다스리시네” 등 하나님의 통치권과 관련되는 단어는 ‘주, 주님-사람, 보살피시네’ 등으로 바꾸고, “십자가 군병, 내주는 강한 성, 믿음이 이기네,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와 심지어 주기도문 영가까지 전장을 삭제한 한국교회의 죄악을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6. 출애굽기 34장 14절에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말씀하신 여호와여,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기 이전부터 일제의 탄압 앞에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독자적으로 신사참배를 실행하고, 장로교의 74%가 이미 자발적으로 신사참배를 행했던 한국교회의 죄악을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7. 예레미야애가 1장 20절에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말씀하신 하나님, 1937년~1939년까지 장로교를 비롯해 각 교단에서 3천여 교회가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맹하여 전승축하회 604회, 무운장구 기도회 8,953회, 시국 강연 1,355회, 국방헌금 1,580,424원, 휼병금 172,646원, 유기 헌납 308점, 위문 181회, 위문대 1,580개(1940년 제29회 장로교회 총회 보고), 총알 제작에 사용하도록 수백 개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종모 및 철제 종각 기타 철물을 일제히 헌납하기로 결의한 죄악을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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