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라는 단어가 저에게 중요하게 다가온 것은 신학생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제 아내는 21살이었고, 30번의 수술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 후로도 25번의 수술을 더 하였습니다. 저는 월터 교수님을 찾아가 이 상황에 대해 조언해 주시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분은 고린도후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긍휼이 많으신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송축받으소서 하나님은 우리를 온갖 시련 가운데서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를 힘입어 시련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하셨다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기 때문이다” (고후 1:3~5)
이 본문은 고난을 많이 겪을수록 우리가 더 많이 위로하게 되고 더 복이 있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 주님, 저에게 더 많은 시련과 고난과 고통을 주십시요. 그러면 주님은 저를 더 많이 위로할 수 있고 저는 그것을 통해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더 많은 위로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러분이 성령님을 초청하시기를 요청합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의 생각을 밝히셔서 고난을 견딜 때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고 그 위로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시련을 당한다면 그것은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다면 그것은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우리가 그 고난을 겪는 것은 너희도 같은 고난을 견디게 하려 함이라” (고후 1:6)
애통할 때 희망을 갖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연단의 끝이 보이지 않고 미래는 온통 어두워 보이는데 어떻게 소망을 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성품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제자와 자녀를 그렇게 놔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온전히 성숙하기를 원하신다고 빌립보서에 나와 있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가서 그 오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그 능력을 확인해 볼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고전 4:19-20)
고난과 위로와 능력은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습니다. 고난과 애통함이 없이는 위로를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 없이는 능력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제 딸은 10살 무렵의 자신을 1킬로미터의 넓이와 1밀리리터의 깊이를 가진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 딸 아이에게는 넓이도, 깊이도 없었습니다. 왜냐면 동화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기적적으로 태어났고 저와 아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모와 삼촌, 모두가 너무나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10살이 되었을 때 저와 제 아내는 이혼을 했습니다. 저는 이혼으로 인해 딸이 트라우마를 겪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딸에 관해 걱정하지 말아라. 이 연단 속에서 네가 나에게 순종하며 인내한다면, 내가 네 딸을 돌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이혼한 아내와 재혼했고 제 딸은 상담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를 가진 사람도 제 딸에게 상담을 받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퇴원을 하고 건강하고 자유롭게 됩니다. 왜 그녀에게 그런 힘이 있는 걸까요? 고린도후서 말씀과 같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에게 위로를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고자 한다면 십자가의 길, 고난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20대 초반의 한 중국 자매 사역자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당시의 일을 간증하면서 그 자매는 울었습니다. 저와 모두는 그녀가 받은 학대의 고통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자매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고난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주님을 위해 고난당했습니다. 저는 제가 얼마나 그러한 영광을 누릴 자격이 없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그렇기에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매는 두 번째 이유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느라 저는 너무 바빴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경배하는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멈춘 상태였습니다.”
자매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 받기를 즐거워했습니다. 사역을 빼앗기고 감옥에 갇혀 다른 죄수들에게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 그리고 주님을 예배하며 알아 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즐거워했습니다.
이제 왜 애통하는 자가 복 받은 자인지 보이십니까? “복 받은 사람들은 지금 슬피 우나 마침내 위로받게 되리라” (마 5:4) 이 위로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데 사용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관계를 든든하게 하는 데 사용될 것입니다.
마치면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일 의향이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위로를 받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서, 주님의 능력 안에서 사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64회 선교 컨퍼런스 가브리엘 선교사의 설교에서 발췌.